이승훈(李承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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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6(영조 32)~1801(순조 1) = 46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의금부 도사(都事)와 평택현감(平澤縣監) 등을 지냈다.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이며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의주부윤(義州府尹)이동욱(李東郁)이며, 어머니 여흥 이씨(驪興李氏)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이용휴(李用休)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지낸 이광직(李光溭)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이태석(李泰錫)이다. 남인(南人) 출신으로 외가 쪽인 이익(李瀷)의 학문을 이었으며,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세례자이며, 한국 천주교회를 세운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영조~순조 시대 활동

이승훈은 서울 남대문 밖 반석방(盤石坊)에서 태어났으며, 염초교(焰硝橋 : 서울시 중구 의주로 2가) 부근에 거주하였다. 그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대 이전부터 인천에서 살았고, 할아버지 이광직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서울로 이주하였다. 이승훈은 1775년(영조 51)에 양근 마재[馬峴]에 살던 정재원(丁載遠)의 딸과 혼인하면서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와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1780년(정조 4)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방목(榜目)』] 그는 평소 학문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일찍부터 외삼촌 이가환(李家煥)의 영향을 받아 서학서(西學書)를 접하였고, 특히 수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승훈은 1783년(정조 7) 말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北京)에 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李檗)은 이승훈에게 북경의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보고, 천주교 서적과 기이한 물건들을 얻어 올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영세도 청하라고 권고하였다. 그해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한 이승훈은 이벽의 말대로 북당(北堂)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만났다. 선교사들은 필담을 통해 그에게 수학을 가르쳐주었고, 틈틈이 천주교의 교리도 교육하였다. 그런 가운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이승훈은 1784년(정조 8) 봄에 아버지의 허락 하에 그라몽(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해 3월 귀국한 이승훈은『성경직해(聖經直解)』·『수진일과(袖珍日課)』·『성년광익(聖年廣益)』등 많은 교회 서적을 가지고 왔고, 이벽과 함께 이 책들을 탐독하면서 천주교의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점차 신앙을 받아들이는 동료들이 많아지자, 그해 겨울 수표교 근처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첫 번째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이 때 이벽과 정약전·정약용 형제, 권일신 등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신자들은 명례방의 장악원(掌樂院) 앞에 있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도 신앙 집회를 가졌다. 그러던 중 1785년(정조 9) 3월에 형조의 금리(禁吏)들이 술 먹고 노름하는 모임으로 의심하여 들이닥쳤다. 당시 방안에는 이벽과 이승훈·정약전·정약용·권일신 부자 등이 모여 있었고, 신자들은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쓰고 있었다. 이들의 거동을 해괴하고 이상하게 여긴 형리들은 김범우를 비롯한 신자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예수의 그림과 서적들, 그리고 몇 가지 물건들을 압수하였는데, 이를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일명 <반회사건(泮會事件)>이라고 한다.

체포된 신자들이 형조로 끌려오자, 형조 판서(判書)김화진(金華鎭)은 양반 자제들은 내보내고 중인이었던 김범우만 형조에 가두고 심문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성균관 유생 이용서(李龍舒)와 정서(鄭漵) 등은 서학을 배척하는 통문을 돌렸다. 이러한 움직임에 놀란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은 아들에게 서학을 끊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가족들을 모아 놓고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는 동시에 그와 관련된 칠언율시(七言律詩) 두 편을 지었다. 이승훈도 아버지의 강요로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벽이문(闢異文)과 벽이시(闢異詩)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잠시 교회를 떠나 있었던 이승훈은 1786년(정조 10) 봄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신자들과 서로 고해하는 방법을 토의하여 시행하였고, 가을에는 신자들로부터 미사를 드리고 견진성사(堅振聖事)를 거행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런 다음 이승훈은 신자 10명에게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평신도가 신부를 임명하고, 또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은 교회법적으로 잘못이며, 독성죄(瀆聖罪)였다. 이러한 사실을 교리서를 읽는 과정에서 알게 된 유항검 혹은 정약전은 1787년(정조 11) 초 이승훈에게 편지를 보내 성사(聖事)를 중지하고 밀사를 북경교회에 파견하여 문의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1789년(정조 13) 10월과 1790년(정조 14) 6월에 윤유일(尹有一)이 북경으로 파견되었다. 이승훈과 신자들은 이 기회에 평신도의 성직 수행 문제, 조상 제사 문제 등을 문의하였고, 선교사의 파견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는 성직 수행의 부당함과 조상 제사를 금지할 것을 지시하였고, 아울러 선교사의 파견을 약속하였다.

한편 1787년 겨울에는 이승훈과 정약용이 과거 공부를 핑계로 성균관 근처 반촌(泮村)의 김석태(金石太) 집에서 천주교 서적을 보았다. 이 사실은 강이원(姜履元)과 이기경(李基慶)에 의해 외부에 알려져서 <반회사건(泮會事件)>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낙안(洪樂安)이 1788년(정조 12) 1월에 이단사설(異端邪說)의 위험성을 언급하는 대책(對策)을 올림으로써, 천주교를 반대하는 척사(斥邪)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1790년(정조 14) 10월 2일 이승훈은 음서로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승정원일기』정조 14년 10월 2일] 그리고 1791년(정조 15) 2월에는 서부도사가 되었고, [『승정원일기』정조 15년 2월 9일] 6월 24일에는 평택현감이 되었다.[『승정원일기』정조 15년 6월 24일] 그런 가운데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尹持忠)이 유교의 상례(喪禮)대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지 않았고, 또 외종형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첫 번째 천주교 박해인 <신해박해(辛亥迫害)>로 발전하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후 두 사람은 그해 11월 13일 전주에서 참수되었다.

진산사건으로 이승훈도 그해 11월 3일 서울로 소환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서양서적을 가져온 일과 반회사건을 문제 삼는 상소들이 연이어 나왔다.(『정조실록』 15년 11월 3일),[『승정원일기』정조 15년 11월 5일],[『승정원일기』정조 15년 11월 6일] 이에 대해 이승훈은 을사추조적발사건 당시 이단을 배척하는 글과 시를 지은 것을 내세우며 자신이 천주교와 관계가 없음을 주장했고, 정조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11월 8일 이승훈의 관직을 삭탈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그러나 1792년(정조 16) 2월 이승훈이 평택현감으로 있을 때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례(拜禮)하지 않은 것이 또 문제가 되었다. 정조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어사를 파견했는데,(『정조실록』 16년 2월 28일) 조사 결과 무함(誣陷)으로 밝혀졌다.(『정조실록』 16년 3월 14일)

진산사건으로 체포되고 삭직되면서 이승훈은 점차 교회에서 멀어졌다. 그러다가 1794년(정조 18) 말에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 소식을 들은 이승훈은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성사를 받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5월에 조정에서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하면서 이승훈은 다시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백서(帛書)』] 한편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배격하는 상소들이 있었고, 그 속에는 이승훈을 공격하는 내용도 있었다.(『정조실록』 19년 7월 24일) 그 결과 정조는 1795년(정조 19) 7월 26일 이승훈을 예산현으로 정배(定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정조실록』 19년 7월 26일) 예산으로 정배된 이승훈은 천주교가 잘못된 것임을 밝힌 유혹문(牖惑文)을 지었다. 그리고 이것을 한문과 한글로 베껴 수령들에게 줌으로써 수령들이 백성들에게 배포하여 효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해배(解配)된 1796년(정조 20) 봄 이후에는 「주자백녹동연의(朱子白鹿洞衍義)」를 짓고, 또 유학의 성경현전(聖經賢傳)이 아니면 책상에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이승훈은 사학(邪學)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그해 2월 10일에 체포되었다.(『순조실록』 1년 2월 9일) 그는 의금부로 압송되어 2월 18일까지 6차례 심문을 받았다. 이승훈은 심문 중에 1791년(정조 15) 이후에는 영원히 천주교와 단절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가 천주교 서적을 구입하여 전파한 것이 인심을 어지럽히고 세도(世道)를 그르친 근본이라는 점과 또 서양인들과 왕래한 죄를 물어 2월 25일에 사형판결을 내리고, 2월 26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하였다.(『순조실록』 1년 2월 25일),(『순조실록』 1년 2월 26일),[『승정원일기』순조 1년 2월 26일]

이승훈은 1856년(철종 7) 4월 6일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격쟁(擊錚)으로 죄가 효주(爻周)되었다.[『일성록』철종 7년 4월 6일] 그러나 1868년(고종 5) 윤4월 7일에 이신규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됨으로써 죄명이 다시 예전처럼 시행되었다.(『고종실록』 5년 윤4월 9일)

이승훈의 유저(遺著)로는『만천유고』(蔓川遺稿)가 알려져 있으나, 이 책에는 여러 사람의 저술이 수록되어 있고, 또 이 책의 서지(書誌) 문제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묘소와 후손

이승훈의 시신은 처형된 지 3일 후에 그의 집으로 갔다가, 여종 이갑례에 의해 인천 만수동 반주골(인천시 남동구 장수동)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1981년 11월 28일에 파묘되어 다음날 천진암(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500)으로 이장되었다.

부인 나주 정씨는 정재원의 딸로 3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이택규(李宅逵)이고, 2남은 이국규(李國逵)이며, 3남은 이신규(李身逵)이다. 또 1녀는 심동량(沈東亮)의 처이다. 한편 이승훈의 집안은 4대에 걸쳐 천주교 때문에 처형된 자가 있었는데, 1801년에는 이승훈, 1868년(고종 5)에는 그의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李在誼)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그리고 1871년(고종 8)에는 증손인 이연구(李蓮龜)와 이균구(李筠龜) 및 손부(孫婦) 정씨(이재겸의 부인)가 제물포에서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황사영 백서(帛書)』
  • 『벽위편(闢衛編)』(이기경)
  • 『벽위편(闢衛編)』(이만채)
  •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상, 분도출판사,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