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종(朴元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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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7년(세조 13)~1510년(중종 5) = 44세].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중종 때에 활동한 무신(武臣)으로 반정공신(反正功臣)이다. 행직(行職)은 영의정(領議政)이다. 자는 백윤(伯胤)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인데, 아버지는 평양군(平陽君)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박중선(朴仲善)이고, 어머니 양천허씨(陽川許氏)는 행호군(行護軍)허균(許稛)의 딸이다. 증조부는 평양부원군의정부(議政府)지사(知事)박석명(朴錫命)이고, 조부는 돈녕부(敦寧府) 부지사(副知事)박거소(朴去疎)이다. 누이가 월산대군부인(月山大君夫人)과 제안대군부인(齊安大君夫人)이고, 중종비(中宗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가 조카이다.

성종 시대의 활동

공신(功臣) 가문에서 태어나 음직(蔭職)으로 무반(武班)에 보임되어 호군(護軍)이 되었다. 1486년(성종 17)에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이 해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 판관(判官)이 되었다가 여러 차례 승진하여 훈련원 첨정(僉正), 부정(副正)이 되었는데, 전직할 때마다 항상 선전(宣傳)과 내승(內乘)의 직책을 겸임하면서 성종을 오래도록 모시었다. 26세 때인 1492년(성종 23) 8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사헌부에서는 연소(年少)하고 무과 출신인 사람에게 동반의 3품직을 제수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이의를 제기하여, 9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공조 참의(參議)로 발령하였다. 1493년(성종 24) 2월에 통정대부병조 참지가 되었다가 1494년(성종 25) 8월에 통정대부병조 참의가 되었다.

연산군 시대의 활동과 반정

1495년(연산군 1)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7월에 이조 참의가 되고, 8월에 병조 참의가 되었다. 11월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이 해 윤11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1500년(연산군 6) 1월에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노모(老母)가 있다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같은 달에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로 바꾸어 임명되었는데, 5월에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이 해 11월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502년(연산군 8) 2월에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고, 6월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 1503년(연산군 9) 12월에 의금부 동지사가 되었다가 그 뒤 중추부 지사(知事)가 되었다.

1506년(연산군 12)에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았다. 그는 조정으로 돌아온 뒤로부터 항상 국사(國事)를 구제할 계책이 없어 상심하다가 마침내 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하여 연산군을 폐위하고, 1506년 9월 2일 중종(中宗)을 임금으로 세웠다.

중종 시대의 활동

1506년(중종 1) 9월 6일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고, 그 며칠 뒤에 병충 분의 결책익운 정국 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 1등으로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이어 10월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1507년 가을에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로로 9월에 추성 보사 우세 정난 공신(推誠保社祐世定難功臣) 1등이 되었다. 1508년(중종 3) 4월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이 해 9월에 돌아왔다. 그때 그는 본인이 염치없이 정승의 자리에 오래 있었다는 이유로 상소(上疏)하여 물러갈 것을 요청하였으나, 중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1509년(중종 4) 윤9월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이듬해인 1510년(중종 5) 3월에 다리에 난 부종 등의 병을 이유로 굳이 사직을 청하니 사직의 윤허를 받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그 해 4월 17일 향년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원종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공신(功臣)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이미 골상(骨相)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신장(身長)이 9척(尺)인데다가 풍채가 시원하여 그 위풍과 거둥이 두려워할 만하였고 우러러볼 만하였으나 화기가 넘쳐흘러 덕이 있는 사람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글을 읽어 대의(大義)에 통달하였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사치스럽고 교만한 습관이 없었다. 비록 스승과 벗을 통해 학문을 갈고 닦는 힘은 부족하였으나, 천성이 순수하게 아름다워 잡되지 않았고 포부가 크고 넓어 피차의 한계를 두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을 포용하였다. 벼슬에 임해 일을 처리할 때에는 마음속에 시비를 확고하게 정하여 사정(私情)으로 인해 법을 굽히지 않았다. 부귀(富貴)가 극도에 달하였으나 가진 체하지 않고 선비에게 굽히며 물어보기를 좋아하였고, 급박한 처지에 놓인 친구를 보면 반드시 여러모로 도와주어 인색하지 않았다. 성품이 문아(文雅)를 좋아하여 항상 서화(書畵)를 수집해 놓고 감상하였고, 문사(文士)를 보면 정성을 다하여 접대하였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중종 묘정에 제향되었다. 신용개(申用漑)가 비명(碑銘)을 지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동쪽 도혈리(陶穴里) 금대산(金臺山) 밑에 있다. 첫째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사복시(司僕寺)부정(副正)윤인(尹磷)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측실(側室)에서 1남을 두었는데, 박운(朴雲)이다. 『순천박씨세보(順天朴氏世譜)』에는 박원종의 또 다른 처로 창녕성씨(昌寧成氏)성준(成準)의 딸과 또 다른 아들로 박비(朴斐)의 이름이 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사계전서(沙溪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