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金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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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6년(선조 29)∼1613년(광해군 5) = 18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죽은 뒤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증직(贈職)되었다. 자는 자서(子瑞)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이고, 어머니 광주 노씨(光州盧氏)는 노계(盧洎)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정(司正)을 지낸 김오(金祦)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현령(縣令)을 지낸 김안도(金安道)이다. 선조(宣祖)의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동생이자, 선조의 부마 달성위(達成尉)서경주(徐景霌)의 맏사위이기도 하다. 소북(小北)에 속하는 판교(板橋)이홍로(李弘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정구(李廷龜)의 아들 이명한(李明漢)과 가깝게 지냈다.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아버지 김제남과 형 김래(金琜), 동생 김선(金瑄)과 함께 모두 화(禍)를 당하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6년(선조 29) 6월 12일에 태어났는데, 연흥부원군김제남과 부인 광주 노씨 사이에 3남 3녀 중에서 2남이었다. 글을 배울 때 어른들이 번거롭게 공부하라고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글을 읽었으므로, 매우 빠르게 문사(文辭)를 깨쳤다. 누나가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인목왕후(仁穆王后)로 책봉되었는데, 선조가 어린 김규가 시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찍이 김규를 궁궐로 불러서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지은 시를 보고 칭찬해 마지않으며 서책을 내려주어 그에게 학문을 권장하기까지 하였다.[『백주집(白洲集)』 권17 「증통선랑사헌부지평김공묘지명(贈通善郞司憲府持平金公墓誌銘)」 이하 「김규묘지명」으로 약칭]

1610년(광해군 2)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이명한(李明漢)과 함께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5세였다. 이어 성균관에 들어가서 유생(儒生)이 되었는데 질문을 하면 곧잘 정곡을 찔렀으므로, 노사(老師)나 숙유(宿儒)들도 모두 그를 눈여겨 보았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던 중에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서 아버지 김제남이 누이 인목왕후가 낳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고 한다는 반역 대죄(大罪)로 무고되었다. 이에 김규 3형제도 체포되어 감옥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 아버지 김제남의 지은 죄를 실토하라고 강요받았으나, 김규 3형제는 끝내 이를 부인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5년 5월 20일),(『광해군일기』 5년 5월 23일),(『광해군일기』 5년 5월 23일) 장형(杖刑)과 압슬형(壓膝刑)을 받고 형과 아우는 죽었으나 김규는 죽지 않고 버티다가, 그해 6월 10일 아버지 김제남이 반역죄로 처형당한 며칠 후인 6월 15일 감옥에서 자살하였다.(『광해군일기』 5년 6월 1일) 그때 김규의 나이가 겨우 18세였다.

성품과 일화

김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온순하고 겸손하며 행동이 단아하고 근신하였다. 또 비록 명문가에서 자랐으나, 평생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남과 말할 때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었으므로 일찍이 재능과 지위로 남을 압도하는 일이 없었다. 이것은 그의 사람됨이 밝고 마음속에 지키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김규묘지명」]

김규는 나이가 어렸지만, 전서(篆書)와 예서(隸書) 두 글씨를 모두 잘 썼는데, 나이 12세 때에 고조부 영의정김전(金詮)의 묘소 앞 비석에 글씨를 썼다. 그는 해서(楷書) 또한 잘 쓴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당시 금석문(金石文) 글씨에 익숙한 자가 많았으나 어린 김규의 글씨를 보고 모두 칭찬하기를, “우리들은 붓을 놓고 물러가야 하겠다.” 하였다.

김규의 장인인 달성위서경주는 계축옥사 때 온 집안이 환란을 당하자 남산(南山)의 사가집에 물러나서 살았다.(『광해군일기』 5년 6월 21일) 이명한의 아버지 이정구도 김제남과 친한 사이라고 하여 함께 구속당하는 바람에 광해군 때 두 집안이 모두 위축되어 감히 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였다. 간혹 이명한이 달성위서경주를 찾아가서 술을 마시게 되면, 달성위서경주는 반드시 사위 김규의 아들 김홍석(金弘錫)을 데리고 나와서 사위의 친구 이명한에게 절을 시키고 울며 말하기를, “김가(金家)의 핏덩이는 다만 이 아이 하나뿐이니, 하늘이 안다면 이 아이로 하여금 커서 자립하게 하련마는…” 하였다. 그 뒤에 이명한이 김규의 비문을 지을 때 아들 김홍석은 20세 가까운 나이가 되어 헌걸차게 자란 청년이 되었다.[「김규묘지명」]

묘소와 후손

처음에 김규 3형제가 옥중에서 죽었을 때 집사람들이 그 시체를 거적으로 싸서 도성 서문 밖에묻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 1623년(인조 1) 3월 서인(西人)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키면서, 폐위되었던 누이가 인목대비에 복위(復位)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김제남을 영의정으로, 김규를 사헌부 지평으로 증직하였다. 이어 인목대비의 부탁을 받은 인조(仁祖)가 예조에 명하여 김규의 묘소를 경기도 고양(高陽)의 대자동(大慈洞)으로 옮겼는데, 그의 고조모(高祖母 : 영의정김전의 부인)의 무덤 곁이다. 김규의 묘소에는 그의 친구 이명한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있다.

부인 달성 서씨(達成徐氏)는 달성위서경주의 딸이다. 자녀는 1남을 두었는데, 아들 김홍석은 그가 죽을 때 겨우 한 살이었다. 서경주는 선조의 둘째 딸 정신옹주(貞信翁主)와 혼인하였는데, 정신옹주는 선조의 후궁 가운데 김인빈(金仁嬪)이 낳은 4남 5녀 중에서 맏딸이었다. 처음에 선조는 김인빈이 낳은 둘째아들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으므로, 광해군 시대에 김인빈과 그 자녀들은 계축옥사 이후에 더욱 위축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에 떨었다. 서인들이 반정(反正)을 계획할 때 김인빈의 셋째아들 정원군(定遠君 : 원종)의 맏아들 인조를 왕위에 추대하였는데, 김규의 부인 달성 서씨는 인조와 고종 4촌간이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백주집(白洲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계곡집(谿谷集)』
  • 『상촌집(象村集)』
  • 『속잡록(續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복집(愚伏集)』
  • 『일사기문(逸史記聞)』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