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회백(姜淮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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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57년(공민왕6)~1402년(태종2) = 46세]. 여말선초(麗末鮮初) 고려 우왕(禑王)~조선태종(太宗)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진주에서 대대로 살았다. 고려 문하성(門下省) 찬성사(贊成事)강시(姜蓍)의 아들이고, 조선세종(世宗)의 동서 강석덕(姜碩德)의 아버지이다. 양촌(陽村)권근(權近)의 문인이다.

고려 말기의 활동

1376년(우왕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좨주(祭酒)가 되었다가,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서 제학(提學)·부사(副使)·사(使)로 승진하였다. 그 사이 1385년(우왕11) 밀직사부사로서 사신(使臣)에 임명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 창왕(昌王)이 즉위하자, 밀직사사로서 다시 사신(使臣)에 임명되어 부사(副使)이방우(李芳雨: 이성계의 맏아들)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부터 그는 이성계(李成桂) 일파와 손을 잡고 고려우왕을 몰아내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우는 데 앞장섰다. 그의 막내 동생 강회계(姜淮季)는 공양왕의 사위였다. 1389년 이성계 일파가 거사할 때 밀직사지사(知事)윤사덕(尹師德)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하고 이를 지켜서 거사를 도왔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 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에 책훈되었으며, 조준(趙浚) 등과 함께 세자 사부(師傅)에 임명되었으나, 공양왕과 인척 관계라고 하여 사퇴하였다. 곧 밀직사사 겸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는데, 그때 이성계 일파가 도참설(圖讖說)에 따라서 수도를 한양(漢陽)으로 옮기려 하자, 그는 상소하여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의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대사헌(大司憲)을 겸임하였다. 그때 정몽주(鄭夢周)·하륜(河崙) 등과 함께 원(元)나라의 호복(胡服)에서 명(明)나라의 복식으로 개혁하여, 이를 착용하게 하였다.

여말 선초의 유배 생활

공양왕 때 고려 왕조를 지키려던 정몽주 일파와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던 이성계 일파 사이에 격렬한 정권 다툼이 전개되었다. 정몽주 일파 간관(諫官)김진양(金震陽) 등이 조준·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할 때 그는 대사헌으로서 대관을 거느리고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1392년(공양왕4) 이성계 일파가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암살하고 김진양(金震陽)·이숭인(李崇仁) 등 고려의 절의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할 때 강회백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뒤이어 그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진양(晉陽: 진주)으로 유배되었다. 강회백이 고향 진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두문불출하고, 오직 조카 하연(河演)만을 불러서 유학을 가르치니, 마을의 친척들이 그의 얼굴조차 보기가 힘들었다.

조선 왕조에 협력

1392년 7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할 때 그의 4형제 중에서 막내 동생 강회계가 공양왕의 사위로서 죽임을 당하였다. 강회백은 조선 건국에 반대한 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의 당파 56인으로 몰려서 장 1백 대를 맞고 고향 진주에서 유배 생활을 계속하였다. 조선태조(太祖)는 왕조의 안정을 구축하기 위하여, 새 왕조에 협력하기를 거부하던 권근(權近) 같은 대유학자와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던 황희(黃喜) 같은 젊은 인재를 설득하여 조선 왕조에 협력하게 만들었다. 태조 말년에 다시 고려의 인재를 대대적으로 발탁할 때 강회백이 모친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었으나, 특별히 기복(起復)하여 그를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임명하였다. 1398년(태조7)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전임되었는데, 당시 동북면 지역은 가장 변방 지역이었으므로 문관이 맡기는 어려운 자리였으나, 그는 임지에 부임하여 성실히 근무하였다. 1402년(태종2) 7월 참판승추부(承樞府) 사(事)·경상도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로 전임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해 11월 병으로 집에서 죽으니, 나이가 46세였다.

저서로는 『통정집(通亭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강회백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벼슬이 떨어져도 원망하지 않고 현달해도 만족하지 않았다. 또한 처자식에게도 일찍이 기뻐하거나 화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이 외조카 하연(河演)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부인 이씨의 여동생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하연이 진주(晉州) 시골에서 집안 살림살이를 돕고 있자, 강회백이 불러서 유학을 가르치고 격려하기를, ‘너는 마땅히 요직(要職)을 거쳐 나라의 대상(大相)이 될 사람이다.’ 하고, 서울로 보내어 과거를 보게 하였다. 훗날 하연은 세종 때 도승지(都承旨)·영의정을 지내면서 세종의 정치를 보필한 큰 인물이 되었다.

가계와 후손

첫째 부인 정씨(鄭氏)가 낳은 3남 2녀 중에서 둘째 강우덕(姜友德)의 아들이 영의정(領議政)강맹경(姜孟卿)이고, 둘째 부인 이씨(李氏)가 낳은 2남 중에서 큰 아들이 강석덕인데 세종의 동서였다. 그 인연으로 그 후손들이 조선왕조 시대에 크게 영달하였다. 특히, 강회백-강석덕-강희맹(姜希孟) 계열이 조선 시대 진주강씨 중에서도 가장 득세하는 집안이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유항시집(柳巷詩集)』
  • 『연경재전서(硏經齋全書)』
  • 『삼봉집(三峰集)』
  • 『포은집(圃隱集)』
  • 『호정집(浩亭集)』
  • 『기우집(騎牛集)』
  • 『사숙재집(私叔齋集)』
  • 『금계집(錦溪集)』
  • 『밀암집(密巖集)』
  • 『무명자집(無名子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