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金大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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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21(순조 21)~1846(헌종 12) = 26세]. 조선 후기 순조(純祖)~헌종(憲宗) 때의 천주교도이자, 천주교 신부. 초명은 김재복(金再福)이고, 보명(譜名)은 김지식(金芝植)이며,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당진과 경기도 용인, 서울 등이다. 아버지는 김제준(金濟俊)이며, 어머니는 고씨(高氏)이다. 할아버지는 김택현(金澤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김진후(金震厚)이다. 한국인 최초로 천주교 신부가 되었다.

순조~헌종 시대 활동

김대건은 1821년(순조 21) 8월 21일 충청도 솔뫼(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고향을 떠난 김대건 가족은 1820년대에 서울 청파(서울시 용산구 청파동)로 이주했다가 다시 용인의 한덕동(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830년대에 양지의 골배마실(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로 이주하였다. 김대건의 집안은 조선에 천주교회가 설립된 1784년(정조 8) 직후부터 천주교를 신봉하였으므로, 김대건도 태어나면서부터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1836년(헌종 2) 부활 주일이던 4월 5일 이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7월 11일 서울에 있는 모방(Maubant) 신부의 집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1836년 12월 3일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와 함께 서울을 떠나, 1837년(헌종 3) 6월 7일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도착했다. 당시 대표부의 대표였던 르그레즈와(Legrégeois) 신부는 마카오에 임시로 신학교를 세워 이들을 교육하기로 했다. 교육은 마카오에 머물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담당하였고, 라틴어, 성가, 교리, 프랑스어, 철학 등을 가르쳤다. 1842년(헌종 8) 2월 프랑스 극동함대의 세실(Cécille) 함장이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를 찾아와서는 조선에 교역을 제의하러 갈 것이라고 하며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요청하였다. 당시 대표부의 리브와(Libois) 신부는 신학생 1명과 매스트르(Maistre) 신부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매스트르 신부는 동행할 학생으로 김대건을 지목했다. 두 사람은 며칠 후인 2월 15일에 세실 함장이 이끄는 에리곤 호에 승선하였다. 일행은 마닐라와 대만(臺灣)을 경유하여 그해 7월 양자강 하구인 오송구(吳淞口)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김대건은 세실 함장의 통역관으로 남경(南京)을 방문하여 8월 29일에 체결된 <남경조약(南京條約)>의 조인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세실 함장이 조선행을 포기하면서 김대건은 그해 9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로 갔다가 10월에 요동 반도 남단인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매스트르 신부에게 신학을 배우는 한편, 그해 12월 29일에는 의주 변문(邊門)을 통과하여 조선 땅을 밟기도 하였다. 하지만 안내자 없이는 서울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1843년(헌종 9) 1월 6일에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31일, 요동 반도 남쪽에 위치한 양관(陽關) 성당에서 제3대 조선 대목구장인 페레올(Ferréol) 주교의 주교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김대건은 서품식에 참석한 뒤 페레올 주교가 머물던 소팔가자(중국 길림성 장춘시 녹원구 팔가자촌)로 거처를 옮겼다. 소팔가자에 머물던 김대건은 1844년(헌종 10) 2월 5일에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훈춘(琿春)으로 떠났다. 이것은 ‘봉황성-의주’ 외에 조선의 동북방인 ‘훈춘-경원’을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길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입국로는 김대건의 답사 결과 위험이 많다는 이유로 포기되었다.

김대건은 1844년(헌종 10) 6월 2일에 차부제품(次副祭品)을 받았고, 12월 10일 이전에 부제품(副祭品)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헌종 11) 1월 1일 변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의 감시가 심하여 외국 선교사가 입국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고 전하였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을 먼저 입국시키기로 하고, 그에게 배를 준비하여 상해로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을 지시하였다. 그해 1월 15일에 서울에 도착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를 맞이하기 위해 석정동(石井洞)에 집을 한 채 마련하였고, 상해로 갈 배도 구입했다. 그런 다음 4월 30일 현석문(玄錫文), 이재의(李在誼), 최형(崔炯) 등 11명과 함께 마포를 출발하여 중국 상해로 갔다. 한편 김대건은 조선에 머무는 동안, 선교사들이 해로로 입국할 때 활용하도록 조선의 지도(조선전도)를 작성하여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고, 14세가 된 학생 두 명을 가르쳤다. 그리고 ‘조선 교회의 창립에 대한 개요’,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의 전말’, ‘1839년에 순교한 순교자들의 행적’으로 구성된『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김대건 일행은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배가 거의 침몰할 위기를 맞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은 끝에 1845년(헌종 11)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마카오에 머물다 김대건이 상해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8월 초순 상해로 왔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포동(浦東) 지역에 있는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김대건의 사제 서품식을 거행했다. 서품식에는 4명의 서양인 신부와 1명의 중국인 신부 및 신자들이 참석했다. 김대건 신부는 그해 8월 24일 다블뤼(Daveluy) 신부의 복사를 받으며 횡당(橫堂)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렸고, 1주일 뒤인 8월 31일에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했다. 이들의 배는 김대건 신부가 타고 온 배를 수리한 것으로, 여행자의 수호성인(守護聖人)인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라파엘 호’라고 명명하였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귀국길에도 폭풍우를 만나 키가 부러지고 돛이 찢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9월 28일 제주도 맞은편 섬에 표착하였다. 이들은 충청도 강경으로 가고자 했고, 10월 12일에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황산 동네)에 내렸다. 도착한 다음날 다블뤼 신부는 강경에서 9시간 거리의 교우촌으로 떠났고, 김대건 신부는 얼마 뒤 상경하였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는 12월 이전에 서울로 왔다. 상경한 이후 김대건 신부는 서울과 경기 일원에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한편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선교사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중국과 연락할 방법을 개척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김대건 신부에게 황해도 연안으로 가서 중국인 어부를 통해 선교사들과 연락할 방법을 찾아보도록 지시하였다. 주교의 명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1846년(헌종 12) 5월 13일 임성룡(林成龍), 엄수(嚴秀) 등 7명과 함께 마포를 출발하여 5월 25일 연평도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을 거쳐 5월 28~29일에 옹진과 장연에서 중국 어선을 접촉하였다. 그리고 중국 어부들에게 베르뇌(Berneux) · 매스트르 · 리브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와 지도를 전달하였다. 임무를 마친 김대건 신부 일행은 순위도 등산진으로 돌아와 구입한 생선이 마를 때까지 며칠간 머물렀다. 그런데 6월 5일 등산진의 관리가 중국 배들을 내쫓기 위해 김대건 신부가 타고 온 배를 징발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가 양반임을 내세워 거절하자 시비가 붙었고, 결국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김대건 신부는 6월 10일(음력 5월 17일)경 해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김정집(金鼎集)은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신문 내용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이에 대해 헌종은 의정부로 하여금 이 문제를 자세히 조사하고 처리하도록 하였다.[『일성록』헌종 12년 5월 20일] 그리고 비변사(備邊司)에서는 “포도청에 분부하여 김대건 등을 서울로 잡아 올리라”고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다.[『일성록』헌종 12년 5월 21일] 그 결과 김대건 신부는 6월 21일(음력 5월 28일)에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해주 감영과 포도청의 신문에서 배교를 거부했고, 오히려 포도청 옥에 함께 갇혀 있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어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옥중에서 관리들의 요청을 받아 영국의 세계 지도를 번역하였고, 또 대신들의 지시로 작은 지리 개설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한편 김대건 신부가 포도청에 갇혀 있는 동안,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 원정 길에 나섰다. 마카오를 출발한 세실은 일본을 거쳐 8월에는 조선 해역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8월 9일(음력 6월 18일) 충청도 외연도(충남 보령 오천면)에 몇 사람을 상륙시켜 조선의 재상에게 보내는 서한을 전달하였고, 이어 자신을 찾아온 조선인들과 문답을 나누었다.[『일성록』헌종 12년 6월 22일],[『일성록』헌종 12년 6월 24일],(『헌종실록』 12년 6월 23일) 세실이 전달한 서한에는 1839년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데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었고, 이에 대한 회신은 내년에 와서 받겠다며 돌아갔다.(『헌종실록』 12년 7월 3일),(『헌종실록』 12년 7월 3일)

김대건 신부는 옥에서 세실의 원정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석방될 희망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위협만 하고 돌아간다면, 조선 천주교회에 매우 큰 해가 될 것이며, 자신도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예상은 적중하여, 세실의 조선 원정 소식과 그가 보낸 서한이 조정에 전달되자 상황이 급변하였다. 즉 이 사건을 계기로 9월 5일(음력 7월 15일)부터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의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고,(『헌종실록』 12년 7월 15일) 결국 김대건을 효수(梟首)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헌종실록』 12년 7월 25일) 이에 따라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참수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1842년부터 1846년 사망할 때까지 21통의 서한과『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중 2통의 서한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서한은 라틴어로 작성되었고, ‘훈춘 기행문’으로 알려진 서한은 한문으로, ‘마지막 회유문’으로 불리는 서한은 한글로 작성되었다. 이후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5일에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묘소

새남터 형장에 묻혀 있던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신자들이 수습하여 와서(瓦署 : 서울 용산구 용산동) 인근에 하룻밤 두었다가 왜고개(서울 용산구 용산동)로 옮겼고, 이후 양성 미리내(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로 이장하였다. 그러다가 1901년 5월 21일 시복 조사를 위해 무덤을 발굴하면서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서울의 대신학교와 미리내 성지 등 각 지에 분배 ·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 『헌종실록(獻宗實錄)』
  • 『일성록(日省錄)』
  • 『해서문첩록(海西文牒錄)』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 「한불관계자료(1846~1856)」, 『교회사연구』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