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문(玄錫文)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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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현석문 |
한글표제 | 현석문 |
한자표제 | 玄錫文 |
분야 | 천주교도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정조~헌종 |
집필자 | 홍연주 |
출신 | 중인 |
성별 | 남자 |
출생 | 1797년(정조 21) |
사망 | 1846년(헌종 12) 7월 29일 |
주거지 | 서울 |
부 | 현계흠(玄啓欽) |
형제 | (누나)현경련(玄敬連) |
처_장인 | 김씨(金氏) →(자녀)1남 1녀 |
자녀 | (아들)현은석 |
저술문집 | 『기해일기(己亥日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현석문(玄錫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헌종실록(憲宗實錄)』 12년 7월 15일, 『헌종실록』 12년 7월 29일 |
총론
[1797년(정조 21)~1846년(헌종 12) = 50세]. 조선 후기 순조(純祖)~헌종(憲宗) 때의 천주교도로, <병오박해(丙午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가롤로.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계흠(玄啓欽)이며, 누나는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사망한 현경련(玄敬連)이다.
순조~헌종 시대 활동
현석문(玄錫文)은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가 되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였는데, 천주교회의 지도자급 인사이던 아버지 현계흠이 체포되어 사형되는 바람에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천주교 교리를 믿는 어머니와 누이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한때 어머니를 따라 숙부가 살던 경상도 동래(東萊)에 가서 살기도 하다가 1821년(순조 21) 다시 상경하여 같은 천주교 신자였던 김 데레사와 혼인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후 현석문은 본격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827년(순조 27) 이경언(李景彦)과 함께 북경(北京)을 왕래하던 정하상(丁夏祥)을 도왔으며,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성직자 영입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836년(헌종 2) 말 샤스탕(Chastan) 신부가 입국하자 그의 활동을 보좌하는 복사가 되어 천주교도들이 모여 사는 교우촌을 순회하였고, 1837년(헌종 3) 말 앵베르(Imbert) 주교가 입국할 때는 의주 변문(邊門)까지 가서 그를 영입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1839년(헌종 5) 기해박해가 발발한 뒤 신자들을 총괄하는 회장으로 임명되어 앵베르 주교의 명을 받아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이재영(李在永)이라는 이름으로 이름을 바꾸고, 3년간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며 순교자들의 행적을 모았다.(『헌종실록(憲宗實錄)』 12년 7월 15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헌종 12년 7월 15일] 그리고 최영수(崔榮受)·이재의(李在誼)·이문우(李文祐) 등이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기해박해 당시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전기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기해일기(己亥日記)』이다.[『기해일기』],[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
한편 신학교 공부를 하기 위해 마카오로 떠났던 김대건(金大建)이 1845년(헌종 11) 부제품을 받고 잠시 귀국하였을 때 현석문은 김대건 일행을 평양에서 맞이한 후 서울로 데리고 와 그의 활동을 도왔다. 이때 김대건은 현석문이 정리한 『기해일기』를 토대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마카오로 보냈다. 그해 4월 다시 상해(上海)로 떠나는 김대건의 행로에 합류한 현석문은 양력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진행된 김대건 신부의 서품식에 참석하고는 10월 페레올(Ferreol) 주교, 다블뤼(Daveluy) 신부, 김대건 신부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
이듬해인 1846년(헌종 12)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현석문은 박해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교회 성물과 서적들을 숨겨놓고 자신 또한 숨었다. 그러나 윤5월 22일 포졸들이 그가 숨어있던 곳에 들이닥쳐 현석문을 비롯한 여러 신자들을 체포하여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승정원일기』헌종 12년 윤5월 22일],[『일성록(日省錄)』헌종 12년 윤5월 23일]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현석문은 교회의 지도자이자 외국을 비밀리에 왕래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져 7월 29일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헌종실록』 12년 7월 29일),[『승정원일기』헌종 12년 7월 29일],[『일성록』헌종 12년 7월 29일]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이후 그는 1925년 7월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 『헌종실록(憲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기해일기(己亥日記)』
-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