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익(愼海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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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2년(선조 25)∼1616년(광해군 8) = 25세]. 조선 후기 광해군 때의 문신. 예조 좌랑(佐郞)을 지냈다. 자는 중거(仲擧)이고, 호는 호산(湖山) · 병은(病隱)이다.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영암(靈巖)이다. 아버지는 신인(愼諲)이고,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충순위(忠順衛)이용(李溶)의 딸이다. 부제학(副提學)신천익(愼天翊)의 쌍둥이 동생인데, 형제가 현주(玄洲)조찬한(趙纘韓)에게 수학하여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강원도 관찰사신희남(愼喜男)의 증손자이고, 사헌부 장령(掌令)신후삼(愼後三)의 증조부다. 택당(澤堂)이식(李植)의 6촌 동생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3년(광해군 5) 신해익은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에 갑과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방목』] 그해 4월 광해군이 성균관(成均館)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서 문묘(文廟)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촉각시(燭刻詩)를 짓도록 명하였는데, 촉각시라는 것은 촛불이 타서 초가 다 녹을 때까지 그 시간 안에 시(詩)나 송(頌)을 1편씩 짓게 하는 것을 말한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9 「관직전고」] 광해군이 신해익의 송(頌)을 읽어보고, “문묘에서 시험을 치른 사람들 가운데 신해익과 5명을 합격시켜라.”고 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5년 4월 18일] 이날 문과에 6인을 뽑고 무과에 26인을 뽑았는데, 문과의 장원은 신해익이고, 무과의 장원은 윤현(尹玹)이었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1] 신해익은 성균관 유생으로서 알성시에 응시하여 장원을 차지하고, 임금의 수레 앞에 호명(呼名)되어 나가서 홍패(紅牌)를 받았는데, 그 거동과 풍채가 고상하여, 마치 날아가는 신선 곧 비선(飛仙)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고 한다.[『현주집(玄洲集)』 권15상 「고좌랑 신군 묘갈명(故佐郞愼君墓碣銘)」]

쌍둥이 형 신천익은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바로 그해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해익이 성균관 유생으로 알성시에서 급한 것을 보면, 그는 형과 함께 사마시에 진사과로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쌍둥이 형제로 두 사람이 모두 현주조찬한에게 수학하여 사부(詞賦)를 잘 지었는데, 형이 먼저 합격하고 동생이 합격하지 못하자, 동생 신해익은 성균관 유생으로 입학하여 각고(刻苦)의 노력을 하였던 것 같다. 그 결과 이듬해 알성시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건강을 크게 해쳐서 고질병을 얻게 되었던 것 같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면, 7품의 벼슬에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형 신천익은 과거의 병과로 급제하여 초사(初仕) 곧 처음 벼슬이 9품 벼슬이었으나, 동생 신해익은 7품 벼슬이었으므로, 동생이 1년 앞서 벼슬길에 나온 형보다 벼슬이 높았다.

1614년(광해군 6) 6품의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이 나빠져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전라도 영암으로 돌아왔다. 그때 스스로 자기 호를 ‘병은옹(病隱翁)’이라고 불렀는데, 고질병에 걸려서 벼슬길에서 물러나서 고향에 은거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질병에 걸려 수년 동안 좋다는 약을 모두 다 구하여 처방하였으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의 고질병은 폐질환으로 추측된다. 1615년(광해군 7) 신해익은 의약(醫藥)을 구하는 일로 서울에 왔다가, 예조 좌랑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9월 27일] 이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임시로 머물렀는데, 형 신천익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으나, 얼마 안 되어 병이 매우 위독해져 끝내 객지의 우거(寓居)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겨우 25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그를 알던 사람이나 모르던 사람이나 모두 그 재주를 아까와 하고 애석하게 여겼다.[『현주집』 권15상 「고좌랑 신군 묘갈명」]

성품과 일화

신해익과 신천익은 쌍둥이 형제인데, 그 어머니가 꿈에 두 마리의 학이 날아와서 양쪽 팔뚝에 앉는데, 하나는 날아서 하늘로 올라가고 하나는 날아서 바다로 들어갔다. 그래서 쌍둥이 가운데 맏이의 이름을 신천익(愼天翊)이라고 하고, 아우의 이름을 신해익(愼海翊)이라고 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8] 또 형 신천익이 먼저 태어났다고 하여 자(字)를 백거(伯擧)라고 부르고, 아우 신해익이 나중에 태어났다고 하여 자를 중거(仲擧)라고 불렀다. 두 쌍둥이 형제는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수려한 용모가 너무나 닮아서 비록 가까운 친척들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차근차근 살펴보지 않으면 서로 분별할 수 없었다.[『현주집』 권15상 「고좌랑 신군 묘갈명」 ]

형 신천익은 우스갯소리를 곧잘 하였으나, 동생 신해익은 말수가 적고 남과 농담하는 일이 없었다. 두 쌍둥이 형제는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자랐다. 어머니 덕수 이씨는 중종 때 사장파(詞章派)의 영수 용재(容齋)이행(李荇)의 증손녀인데, 비록 살림은 빈곤하였지만, 일찍부터 두 아들을 현주조찬한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두 아들은 장성하면서 더욱 말과 행동이 의젓해지고, 또 학문에 힘을 기울여서 날로 학업이 진보하였다.[『현주집』 권15상 「고좌랑 신군 묘갈명」] 어머니 덕수 이씨는 택당이식의 아버지 찰방(察訪)이안성(李安性)과 4촌간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들보다 나이가 8세가 많은 이식은 쌍둥이 6촌 동생들을 귀여워하였고, 두 쌍둥이가 과거에 급제하자, 그 뒤를 돌보아주었다.

신해익은 행동거지가 항상 법도(法度)에 맞았으며, 성품이 내성적이었으나, 지극히 효성스러웠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병환이 났었는데, 집이 너무 가난하여 맛있는 음식을 봉양할 수 없었다. 그는 결심하기를, “한 현(縣)의 원님 자리만을 얻으면 족하겠다.” 하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병든 몸을 추스려서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어머니를 위한 계책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성균관 전적으로 있을 때 오히려 권력자의 눈치를 보면서 시속(時俗)에 따라서 출세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현주집』 권15상 「고좌랑 신군 묘갈명」] 그는 고질병이 점차 심해지자, 고향 영암으로 돌아와서 모든 영광을 어머니에게 돌리고 나서 말하기를, “저의 뜻은 이와 같은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니, 어머니도 아들의 건강을 위하여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였다. 그는 마침내 사직(辭職)하고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가족들과 함께 오래도록 한가롭게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고질병에 걸려 수년 동안 고생하면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25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객사(客死)하였다.

묘소와 후손

스승 현주조찬한은 제자 신해익을 아끼고 사랑하였는데, 그가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묘갈명(墓碣銘)을 지었으므로 그 묘갈명이 남아 있다.[『현주집(玄洲集)』 권15상 「고좌랑 신군 묘갈명(故佐郞愼君墓碣銘)」] 부인 고흥 유씨(高興柳氏)는 유현남(柳賢男)의 딸인데, 자녀는 외아들 신성기(愼聖虁)를 낳았다. 그 후손이 이어져서 증손자 신후삼이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택당집(澤堂集)』
  • 『현주집(玄洲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약천집(藥川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