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은(郭垠)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22일 (금) 01:37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91년(성종22)]. 조선조 초기 성종(成宗) 때 활동한 문신(文臣). 자는 안부(岸夫), 호는 용촌(龍村)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충청도 옥천(沃川) 출신이다. 고려삼사 좌윤(三司左尹)곽수원(郭綏元)의 손자이다. 곽수원이 선산에서 옥천으로 옮겨와서, 그 후손들이 옥천 구룡촌(九龍村) 일대에 많이 살았다.

성종 시대 활동

1472년(성종3) 식년(式年) 문과에 아헌(亞獻)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교검(校檢)에 보임되었다. 그해 10월 상호군(上護軍)구달충(具達忠)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할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는데, 그때 성종(成宗)은 곽은(郭垠)에게 전지하기를, “우리나라는 금은(金銀)의 공물(貢物)을 면제하여 주도록 청해야 한다.” 하고, 전별연(餞別宴)을 특별히 베풀어 주었다. 1481년(성종12)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1483년(성종14)에 공조(工曹)정랑(正郞)으로 옮겼다가, 감공관(監工官) 첨정(僉正)을 거쳐, 정5품하 통선랑(通善郞)사헌부수(守)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1484년(성종15) 전설사(典設司)수(守)에 임명되었다가, 1486년(성종17) 정5품상 통덕랑(通德郞)사헌부장령으로 전임되었다. 1486년(성종17) 경연(經筵)에서 장령곽은이 직언(直言)하기를, “임사홍(任士洪)의 무리는 서로 붕당을 맺어 조정을 어지럽혔으므로 죄를 용서할 수 없으니, 직첩(職牒)을 돌려주지 마소서.” 하고, 임사홍을 탄핵하였는데, 성종이 특별히 사헌부집의(執義)로 승진시켰다. 외직으로 나가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었는데, 치적이 전국에 최상(最上)을 차지하였다. 1491년(성종22)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나,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담양 관아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숨을 거두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격은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였으나, 행정은 관대하고 대범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아전들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부정한 짓을 못하고,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입어서 그를 우러러 받들었다.

그가 전라도담양부사(潭陽府使)로 있을 때 부역(負役)을 경감해 주고 조세를 감면해 주어,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입어서 크게 고마워하였다.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로 영전되었으나,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관아에서 과로로 쓰러져서 객사(客死)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상복을 입고 슬퍼하면서 반장(返葬)을 도왔고,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모두 함께 울었다. 그때 고을 사람들이 그를 위해 소식(素食)하였기 때문에 생선장수[魚商]가 한동안 그 경내(境內)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에 몇 세대가 지나도록 그 은혜를 잊지 못한 담양 사람들이 해마다 그가 죽은 12월 17일 기일이 돌아오면 재(齋)를 드리거나 제사를 지내면서 그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당대 추강(秋江)남효온(南孝溫)은 곽은을 ‘대덕(大德)’이라고 칭찬하였고, 후대 율곡(栗谷)이이(李珥)는 이조판서로 있을 때 곽은을 ‘현인(賢人)’이라고 칭송하면서 그 자손을 특별히 기용하였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충청도 옥천군(沃川郡)의 남쪽 동림산(東林山)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墓碣)이 남아 있다. 충청도 옥천 창주서원(滄洲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사가집(四佳集)』
  • 『추강집(秋江集)』
  • 『남계집(藍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한수재집(寒水齎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인재집(忍齎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목민심서(牧民心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