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正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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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양인 출신의 의무 군인으로 이루어진 육군 병종(兵種).

개설

조선시대의 군역제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로서 모든 양인 남자에게는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단, 관리나 향리와 같이 직역을 수행하는 사람은 그 직역이 군역을 상쇄하였다. 양인 농민 출신의 의무 군인으로 이루어진 육군 병종을 정병이라고 부른 것은 1459년(세조 5)의 병제 개편으로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는 남방 6도(道)에서 서울에 번상(番上) 근무하는 군인을 시위패(侍衛牌), 각 지방에 남아서 근무하는 군인을 영진군(營鎭軍)·수성군(守城軍), 북방의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근무하는 군인을 정군(正軍)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때 우선 평안·함길도의 정군과 남방 6도의 시위패를 통일하여 정병이라 부르기로 하고 말이 있는 사람을 정기병(正騎兵) 혹은 기정병(騎正兵), 기병(騎兵)이라 하고, 말이 없는 사람을 정보병(正步兵) 혹은 보정병(步正兵), 보병(步兵)이라 규정하였다. 그리고 1464년(세조 10)에 영진군과 수성군 등도 정병에 합속되었다. 이로써 의무적으로 군역을 치르는 육군 전체가 정병으로 단일화되어, 양인의 의무 군역은 정병과 수군 두 병종으로 정리되었다.

정병은 흔히 번상정병과 유방정병으로 구분되었다. 이것은 번상 시위를 주 임무로 하는 시위패와 도내에서 유방(留防) 또는 부방(赴防)하는 영진·수성군, 정군 등을 합쳐 개편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정병의 규모는 1475년(성종 6)의 기록에 의하면 전체 총 72,105명인데, 북방 2도에서 부방하는 18,684명을 제외하고 번상군은 27,621명, 유방군은 25,200명이다. 번상은 8교대로 2개월씩 근무하고, 유방은 4교대로 1개월씩 근무하였으므로, 실제 번상하는 인원수는 3,452명이고, 유방하는 군인 수는 6,355명이다. 이와 같이 정병은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뭄, 흉년 등의 이유로 실제 번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중앙에서의 군사적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은 편이다.

정병 가운데에는 기정병(騎正兵)과 보정병(步正兵)이 있어서 기병과 보병으로 구분되었다. 『경국대전』의 급보규정(給保規定)에는 전자에게 1보(保) 1정(丁), 후자에게 1보를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경국대전』에서 정병은 갑사와 더불어 궁성 문 파수와 도성 내외 순찰의 임무를 맡도록 되어 있었다. 정병은 근무일수가 차서 거관(去官)하면 종5품의 영직(影職)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정병이 거관해 영직을 받는 것은 비록 실직(實職)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신분상 상당한 혜택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거관의 규정은 급보의 혜택과 더불어 의무병으로서의 정병에 대해 군역의 대가로 주어지는 국가적 시혜가 제도상의 보장을 받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내용 및 변천

15세기 중반에 성립한 정병은 16세기 군역제의 변동 속에서 기병의 보군화(步軍化)와 보병의 수포군화(收布軍化) 현상이 진행되었다. 특히 세조대 보법(步法)의 실시와 성종대 ‘토지준정(土地准丁)’의 폐지는 군역제의 동요를 심화시켰다. 조선초기에 토지 소유와 인정(人丁)의 수를 함께 고려하여 편제하던 군역 편제 방식이 이를 통해 단지 인정만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자, 16세기에 들어와 토지 없는 가난한 양인 농민들이 군역을 피하여 유리·도망하는 현상이 널리 나타났다. 이것은 군역제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정병 중 기병은 보군으로, 보군은 수포군으로 변질되어갔던 것이다.

기병의 보군화에 있어서는 정병 중 기병은 지방에서 부유하고 신체 건장한 사람으로 충원하였다. 기병은 말과 군장을 갖추고 궁궐 시위와 도성 순찰의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으로서 때로는 국왕 가까이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병의 사회적 위치는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입역 기간 중에는 도시(都試)에 응시하여 갑사(甲士)나 무반으로 진출하는 기회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 부유한 사람들은 차츰 권리보다는 의무가 많은 기병을 기피하고 갑사로 올라가거나, 아예 보병이나 보인(保人)으로 가려고 하였다. 군적(軍籍) 작성 과정에서 향리들이 부유한 자들에게 뇌물을 받고 군역을 면제시켜준다든지, 보다 편한 병종으로 편입시켜주는 부정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일단 군적에 올라 기병으로 등록된 자들은 유방(留防)과 번상(番上)으로 나뉘어 군역 근무에 임하여야 했다. 특히 번상 근무를 하는 자들은 번상 기일 5일 전까지 상경하여야 했는데 교통이 불편한 당시로서는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 자체가 고역이었다. 강원도나 전라도·경상도의 연해, 산간벽지에 거주하는 군인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데만 8~9일이 걸렸다. 또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강물을 건너다 빠지거나, 도적을 만나 서울에서 생활할 물자를 강탈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올라온 번상 기병들은 군영에 거처하면서 기마(騎馬)·복마(卜馬)와 군장의 점열(點閱)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군영이라는 곳은 몹시 비좁고 불편했으며, 군장을 갖추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종이로 만든 갑옷[紙甲]이라도 값이 면포 50필에 해당하였다. 이에 기병들은 아무런 군장도 지니지 못한 채 번상하기도 하였다.

16세기 이후 기병들은 말을 갖추기가 힘들어졌다. 조선은 원래 “농사에는 소가 중요하고, 병사(兵事)에는 말이 중요하다.”라고 하여 말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16세기 지주제의 전개 속에서 확대되는 농지 개간 등에 의해 목장이 줄어들면서 말의 수가 감소하였다. 14세기 후반부터 연해 지역의 낮고 평평한 곳에 설치된 목장이 해도(海島)로 옮겨가고 있었고, 16세기에는 해도의 목마장도 대부분 개간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1522년(중종 17) 특진관고형산(高荊山)은 “성종조의 마적(馬籍)을 보면 말의 수가 4만여 필에 달하고 있는데, 지금은 겨우 2만여 필만 남아 있습니다. 또 그중 쓸 만한 말은 없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가(馬價)가 폭등하였다. 말 한 필의 값이 면포 100~150필에 달하였다. 그래서 “예전에는 말을 탄 군사가 천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겨우 40~50명에 불과하다.”라거나 “말을 가지고 있는 군사가 백에 하나, 둘도 안 된다.”라는 탄식이 나왔다(『중종실록』 17년 2월 10일).

이런 상황에서 기병 대부분은 서울에 와서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탔다. 자신의 말을 소유하고 있는 자라도 서울에서는 말을 사육하는 비용이 많이 들어 자기 말은 돌려보내고 말을 대여해서 탔다. 정부에서는 군사력 유지를 위해 말을 빌려 타는 자나 빌려주는 자나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엄단한다고 하였으나 이렇게 엄벌 위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차츰 정부 내에서 시세(時勢)와 인정(人情)에 따라 말을 빌려 타는 것도 용인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말을 빌려 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 한 필을 하루 빌리는 데 거의 40필이 든다.”라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군사력 증강에는 아무 도움도 없으면서 가난한 군사들만 말을 빌리는데 더욱 피폐해지고 단지 말을 빌려주는 자들만 이익을 본다는 말이 나왔다. 중종대부터 조정에서 기마와 복마 중에서 복마는 폐지하고 기마만 갖추게 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쉽게 합의되지 못하다가 1583년(선조 16) 병조 판서 이이(李珥)에 의하여 복마가 폐지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직후 기병은 기마까지 폐지되어 이름만 기병이지 실제는 말이 없는 보군이 되고 말았다.

보병의 수포군화에 있어서는 정병 중 보병은 15세기 말부터 역군(役軍)·역졸(役卒)로 변질되었다. 1473년(성종 4) 대사간정괄(鄭佸)은 “이른바 보병이라 하는 자들은 서울에 올라오면 모두 토목공사에 동원되어 한 사람이라도 시위하는 자가 없다. 이들은 이름은 군인이지만 실은 역졸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성종실록』 4년 10월 2일). 16세기에 들어와 농업경제의 변동과 상품유통의 발달 속에서 사치 풍조가 만연하면서 지배층들은 궁궐, 저택 등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등 토목공사가 급등하였다. 원래 토목공사는 급료를 지급받는 군인인 팽배(彭排)대졸(隊卒)이 담당하였으나, 16세기에 이르러 이들이 거의 사라졌다. 이렇게 되자 보병과 수군이 토목공사에 동원되어 역졸화(役卒化)하였다. 보병은 기병과 같이 군장을 갖출 필요도 없었고, 정부 역시 군장 점열을 하지 않았다. 1493년(성종 24)에는 “군사를 쓸 때 보병은 무기도 지니지 않았으니 제외한다.”라고 하여 아예 군사력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조선전기에는 큰 전쟁이 없이 평화가 계속되어 입역(立役) 보병이 역졸화하는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그런데 보병이 역졸로 변하였지만 이것이 요역화(傜役化)한 것은 아니었다. 요역은 민호(民戶)를 대상으로 하여 민간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호역(戶役)이었지만, 군역은 특정한 사람을 대상으로 특정한 역을 부과하는 신역(身役)이었던 것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요역에 의해 징발되는 연호군(煙戶軍)보다 보병을 각종 역사(役事)에 먼저 동원시키고 있었다. “축성을 할 때 마땅히 보병을 쓰고, 부족하면 연호군을 쓴다.”라는 말처럼 성을 쌓을 때는 보병을 동원하였다. 이것은 요역에 의해 징발되는 연호군은 단기간에만 입역하였으므로, 공사 기간이 긴 역사에는 군인을 동원하는 것이 번거롭지 않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보병은 각 관청의 심부름꾼인 사령(使令)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병이 역졸화하고 또 사령으로 동원됨에 따라 점차 지방에 있는 당번(當番) 보병들은 타인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의 역을 대신 지게 하는 대립(代立)을 행하였다. 자신이 직접 입역하는 것보다 대립을 하는 것이 신체적, 경제적으로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들어와 정부로서도 보병은 군사력과는 관계없는 역졸로 변하였기 때문에 점차 대립을 허용하는 추세로 나아갔다. 16세기 조선 사회 역시 대립제가 성행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구비하였다. 지주전호제의 전개 속에서 토지를 상실하거나 각종 국역의 부담을 피하려는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 유망하여 도시로 집중하였다. 이렇게 서울로 올라온 유민들은 대립으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16세기에 들어와 대립가(代立價)는 계속 인상되어 갔다. 대립가는 풍흉에 따른 곡가의 변동과 면포의 생산량에 따라 변동하고 있었지만 계속 인상되는 추세에 있었다. 1536년(중종 31)에는 보병 한 번의 번가(番價)가 100필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역을 대신 지는 대역인(代役人)들은 역이 힘들다고 계속 올려 받았다. 그리고 경주인(京主人)들이 각 지방 보병들의 대립가를 일괄로 받아다가 서울에서 사람을 고용하여 입역시키면서 중간 차익을 챙기는 행위도 성행하였다. 이와 같이 사적으로 수수(收受)되는 대립가가 폭등하여 보병들이 고통을 겪자 정부에서는 우선 대립가를 공정(公定)하였다. 1493년(성종 24)과 1518년(중종 13)에는 각각 1개월의 대립가를 5승포 3필과 7필로 공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립가의 공정에도 불구하고 대립가는 계속 인상되어 갔다. 이에 정부에서는 아예 대립가의 징수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을 시행하였다. 1538년(중종 33) 정부는 지방관들이 보병 가포(價布)를 병조로 올려 보내면 병조에서 이것을 역을 필요로 하는 각처에 분송(分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보병 가포는 병조 소속의 사섬시(司贍寺)에서 관장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보병은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군포만 납부하면 군역을 면하게 되는 수포군(收布軍)이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16세기 이후 정병에서는 기병의 보군화와 보병의 수포군화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기병은 말[馬]이 없이 번상 근무를 하는 보군으로서 군역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보병은 군역세로서 가포(價布)만을 납부하면 군역의 임무가 면제되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지방군 지휘관들이 군역 복무를 하러 온 군사를 돌려보내고 그 대가로 포를 거두는 불법적인 방군수포(放軍收布) 행위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와 지방군도 차츰 군포를 내고 대립인을 고용하는 체제로 나아갔다.

의의

세조 때에 다양한 육군 병종이 정병으로 통일된 것은 우리나라 군역 발전 과정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중세 시기의 다양한 양인의 군역이 단일화, 균등화된 것이다. 한편 16세기 이후 전개된 기병의 보군화와 보병의 수포군화는 조선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서, 이러한 변화의 추세 속에서 17세기 이후 급료병제가 등장할 수 있었다. 급료병제의 등장은 조선 사회가 중세 체제에서 중세 사회 해체기로 나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金鍾洙, 『朝鮮後期 中央軍制硏究』, 혜안, 2003.
  • 閔賢九,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韓國硏究院, 1983.
  • 金光哲, 「朝鮮前期 良人農民의 軍役 : 正兵을 中心하여」, 『釜山史學』3, 1980.
  • 金鍾洙, 「16세기 甲士의 消滅과 正兵立役의 變化」, 『國史館論叢』32, 1992.
  • 오종록, 「조선 초기 正兵의 軍役 -1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韓國史學報』창간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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