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전(眞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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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왕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다가 정해진 날 어진을 벽에 걸고 제사 드리던 건물.

개설

고려시대에는 궁궐 안 경령전(景靈殿)에 태조와 직계 4대 선조의 어진을 모셔 놓고 정월 초하루, 추석, 단오 등에 왕이 친히 전물(奠物)을 올리고 의례를 지냈다. 궁궐 밖 여러 절에도 태조를 비롯한 역대 왕과 왕비의 초상화나 초상 조각을 모셔 놓고 불교식으로 재를 올리는 건물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유풍에 따라 왕대마다 왕이나 왕비를 위한 사당 혹은 진전사원(眞殿寺院)에 초상화를 봉안하고 의례를 지냈다. 조선전기에는 함흥, 경주, 평양, 전주, 개성 등 5곳에 세워진 태조진전(太祖眞殿)이 진전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나 태조 이외의 다른 왕과 비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의례를 올리던 진전은 세종 때 통폐합된 뒤 유교식 사당으로 변모되었다. 즉, 왕과 비의 초상화는 경복궁 내에 새로 세운 선원전(璿源殿)에 궤 안에 넣은 채 보관되었다. 대신에 태조와 직계 4대의 위패를 봉안할 문소전(文昭殿)을 경복궁 안에 새로 세우고 유교식 제사를 올림으로써 사실상 태조진전을 제외한 진전은 폐지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려 낸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세조의 잠저(潛邸)에 봉안하고 남별전(南別殿)이라고 불렀다(『광해군일기』 10년 7월 18일). 여기에서 조선전기와 구별되는 다른 방식의 진전이 시작되었다. 숙종대에는 창덕궁 안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전기 선원전과 구별되는 새로운 진전이 정립되었다(『숙종실록』 39년 4월 11일). 숙종은 1690년(숙종 16) 남별전에 영희전(永禧殿)이라는 호를 부여하였다(『숙종실록』 16년 10월 27일). 이후 진전은 1908년(융희 2)에 선원전, 영희전 그리고 모든 봉안처의 어진을 한곳으로 통폐합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조선시대에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지은 진전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창덕궁의 선원전과 신선원전(新璿源殿) 그리고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진전에 봉안되어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왕의 초상화도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국립고궁박물관의 영조 어진, 고종 어진, 순종 어진 등만이 남아 있다.

내용 및 특징

진전은 왕의 초상을 봉안한 사묘로서 왕실의 제례를 대표하는 시설이었기 때문에 관찬(官撰) 기록이 적지 않았다. 조선전기의 태조 진전에 대해서는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 「진전도(眞殿圖)」와 간략한 설명이 실려 있어서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궤와 같은 문서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건물 내외의 시설이나 건축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조선후기에는 함흥 준원전, 전주 경기전, 평양영숭전(永崇殿) 등이 회복되었으나 경기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되었다. 때문에 규모와 격식에 대해서는 경기전을 기준으로 짐작해 볼 뿐이다.

대신 도성 안에 세워진 영희전이나 궁궐 안에 세워진 선원전에 대해서는 의궤와 같은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즉, 영희전의 경우 도감을 설치하여 건축 공사를 시행하고 의궤를 편찬한 경우가 많았다. 다만 궐내 진전인 선원전의 경우에는 도감을 설치하지 않았고, 비용도 국가 기관인 호조(戶曹)가 아니라 왕실 사고(私庫)인 내탕(內帑)에서 지출하였고 의궤도 편찬하지 않았다. 1900년(광무 4)의 경복궁·창덕궁 제일실 증건 공사와, 경운궁 선원전 중건 공사에 대해서만 도감을 설치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의궤를 편찬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 아직 왕실의 진전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환조의 계성전(啓聖殿),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의안전(仁安殿),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인소전(仁昭殿), 태조와 신의왕후의 어진을 합봉(合奉)한 문소전, 태종의 광효전(光孝殿) 등이 난립하였다. 그러다 세종이 어진 봉안처인 선원전과 원묘인 문소전을 세우면서 진전을 통폐합한 이래 진전 제도가 확립되었다.

태조의 어진만을 모시고 의례를 거행하던 외방 진전 5곳은 조선전기에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경기전, 준원전, 영숭전만이 회복되는 등 그 상징적 기능이 약화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도성 안에 영희전, 창덕궁 안에 선원전이 진전으로 확립되면서 태조 이하 역대 왕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진전이 증건되었다. 생전에 왕의 영정을 그린 경우, 특정 장소에 보관하였다가 사후에는 그곳에서 의례를 거행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숙종 어진과 영조 어진을 각각 봉안한 강화도의 장녕전(長寧殿)만녕전(萬寧殿), 정조 어진을 봉안한 화성의 화령전(華寧殿), 1836년(헌종 2)에 순조 어진과 익종 어진을 봉안한 경우궁(景祐宮) 성일헌(誠一軒), 철종 어진을 봉안한 천한전(天漢殿) 등이 그것이다. 그밖에 궁궐 내의 여러 건물, 예컨대 경희궁태녕전(泰寧殿), 창덕궁주합루(宙合樓), 경복궁집옥재(集玉齋) 등도 임시로 어진을 봉안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영희전은 원래 세조의 잠저였으나,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이 생모인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영정을 모시고 봉자전(奉慈殿)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비로소 제사와 관련되었다(『광해군일기』 2년 윤3월 6일). 같은 해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여 종묘에 부묘한 뒤에는 비워 두었다. 그러다 임진왜란 중에 무사했던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임시로 봉안하면서 남별전으로 불렀다. 강화도에 새로 영숭전, 봉선전(奉先殿)을 지은 뒤 어진을 이곳으로 옮겼고 남별전은 다시 비게 되었다. 1632년(인조 10)에는 원종의 어진을 남별전 뒤에 새로 지은 온돌방에 봉안하고 숭은전(崇恩殿)이라 불렀다(『인조실록』 10년 3월 9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의 진전 두 곳이 화를 입자, 이듬해에 심하게 훼손된 태조 어진은 땅에 묻었다. 세조 어진은 남별전 주벽에 봉안하였고 원종 어진은 동벽에 봉안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도감을 설치하고 크게 수리한 남별전의 내부에는 오봉산병풍(五峯山屛風), 모란병풍(牡丹屛風), 용상(龍床), 욕석(褥席), 전내염장(殿內簾帳), 상탁(床卓) 등이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이때 어진 봉안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으리라고 판단된다. 1610년부터 1670년(현종 11)까지 60여 년에 걸쳐 남별전에서 시행된 건축 공사에 대해서는 『영희전별등록(永禧殿別謄錄)』에, 1676년(숙종 2)의 수리에 대해서는 『남별전중건청의궤(南別殿重建廳儀軌)』에, 1748년(영조 24)과 1772년(영조 48)의 두 차례에 걸친 중수에 대해서는 『진전중수영건청의궤(眞殿重修營建廳儀軌)』에, 1858년(철종 9)의 북변 1실 증건에 대해서는 『남전증건도감의궤(南殿增建都監儀軌)』에 잘 정리되어 있다.

1900년(광무 4)에는 남별전이 경모궁 터로 옮겨졌는데 이때 정전에 1실을 증건하였다. 이로써 경운궁, 경복궁, 창덕궁 등 여러 궁의 선원전과 함께 신실 7실을 갖춘 정면 9칸, 측면 4칸 규모의 건물로 새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1908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사제(祀祭) 체계가 와해될 때, 어진이 모두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지면서 폐기되고 국유화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진전중건도감의궤(眞殿重建都監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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