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탕(內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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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 사유재산의 궁궐 내 비축 공간 또는 왕의 사유재산.

개설

조선초기 내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는 궁궐 내에 왕의 사유재산을 비축하는 공간을 지칭하는 말로, 대표적인 곳으로 상의원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왕의 사유재산 그 자체를 지칭하는 말로, 이와 관련된 기관으로는 내수사가 대표적이다. 조선후기에는 내수사에 더하여 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용동궁(龍洞宮)·수진궁(壽進宮) 등 이른바 4궁까지도 왕의 사유재산, 즉 내탕으로 간주되었다. 1907년 2월 24일자로 내수사와 4궁이 폐지되면서 왕 사유재산으로서의 내탕은 사라지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내탕은 내(內)와 탕(帑)의 합성어로서 ‘내’는 ‘궁궐 안’이란 의미이고 ‘탕’은 ‘창고’란 의미이다. 즉, 내탕의 원초적인 의미는 ‘궁궐 안의 창고’인데, 궁궐 주인이 역시 ‘궁궐 안의 창고’ 주인도 되므로 내탕은 왕 사유재산의 궁궐 내 비축 공간이라는 의미는 물론 왕의 사유재산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조선시대 내탕이 왕 사유재산의 궁궐 내 비축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로는 상의원(尙衣院)을 들 수 있다. 예컨대 1399년(정종 1) 5월 1일 실록 기사에 의하면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시무(時務) 10가지를 진술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상의원은 전하의 내탕이므로 의대(衣襨)·복식(服飾)의 물건을 일체 관장하는데, 다만 간사한 소인의 무리로 하여금 맡게 하여 절도 없이 낭비하는 데에 이르니, 이제부터 공정하고 청렴한 선비를 뽑아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이었다(『정종실록』 1년 5월 1일).

『경국대전』에 의하면 상의원은 정3품아문으로서 왕에게 드리는 의대 및 궐내의 재화·금보(金寶) 등의 물품을 관장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재화는 복식에 수반되는 각종 금은 장신구를 의미하며, 금보는 종묘에 모셔졌던 선왕의 금보를 의미하였다. 의대·재화·금보는 왕의 사유재산이었으므로 이들 물품이 비축된 상의원이 내탕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상의원은 호조에서 받은 공납품으로 재원을 마련하였지만 조선후기에는 여기에 더하여 균역청·상평청·진휼청 그리고 선혜청 등에서 받은 공납품으로 재원을 마련하였다. 상의원으로부터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왕은 환관을 통해 승정원에 알리게 하고, 승정원이 상의원에 전달하여 조달하게 하였다.

한편 태조이성계 이래 조선의 역대 왕은 공적인 국가 재정과는 구별되는 사적인 재산을 소유하였는데, 그 사유재산이 내탕이었다. 태조이성계의 경우 왕이 되기 이전에 함경도 지역에 노비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왕이 된 후 고려왕실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재산까지 획득함으로써 그의 사적 재산은 막대하였다. 태조이성계는 왕이 된 후 자신의 잠저를 본궁이라 하고 그 본궁에서 즉위 이전의 사적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관행은 정종·태종·세종에게도 이어져 각각 자신들의 잠저를 본궁으로 삼아 사적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는 제왕 가운데 창업한 자는 후계 왕에게는 왕권을 물려주고 나머지 자녀들에게는 잠저 때의 사적 재산을 나누어 주던 고려 이래의 관행이기도 하였다.

세종은 태조·태종 그리고 자신의 본궁 재산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내수소(內需所)를 설치하였다. 내수소는 궁내의 수용을 담당하던 내수별좌(內需別坐)가 1430년(세종 12) 6월에 개편된 관사였다. 이 내수소가 1466년(세조 12) 1월 15일의 관제개편 때에 내수사가 되었으며 『경국대전』에서는 정5품아문으로 명문화되었다. 이처럼 조선건국 이후 본궁·내수소·내수사에서 관리한 왕의 사유재산이 바로 내탕이었는데, 내탕의 출납은 환관들이 장악함으로써 양반관료들의 간여에서 벗어나 있었다.

변천

조선시대의 상의원은 비록 내탕으로 간주되기는 했지만 공납이라는 공적제도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었기에 소장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이 양반관료들에게 노출되기 쉬웠다. 이에 조선시대 왕은 상의원 이외에 별도로 상고(廂庫)라고 하는 내탕을 운영하였다. 상고는 1405년(태종 5) 10월 19일에 이궁인 창덕궁을 완성하였을 때 상고 3칸도 함께 설치하였다는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었다(『태종실록』 5년 10월 19일). 상의원이 경복궁에 있었으므로 이때의 상고는 이궁을 건립함에 따라 상의원의 출납을 편리하게 하고자 분원 형태로 설치되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창덕궁의 상고는 상의원의 관할에서 벗어나 환관이 관할하게 되었고 그 결과 양반관료들의 관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상고는 내상고(內廂庫)·내상(內廂)·내고(內庫)·국고(國庫) 등으로 불렸으며, 상의원은 공적 내탕으로 상고는 사적 내탕으로 구분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내수사는 전국에 걸쳐 있는 왕의 사유재산인 내탕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크게 증식시키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재산은 주로 토지와 노비였는데 내수사의 관원들은 왕권을 배경으로 토지와 노비를 크게 늘렸다. 예컨대 내수사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는 다른 곳에 비해 세금을 경감시키거나 소작료를 낮게 책정하는 등의 특혜를 베풀었다. 이에 따라 관리들로부터 온갖 침탈을 당하는 농민들이 서로 내수사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고 싶어 했다. 나아가 아예 자신의 토지를 내수사에 헌납하고 그 대신 싼 세금을 내며 관료들의 횡포에서 벗어나려 한 농민들도 적지 않았다.

내수사에서 늘린 재산은 토지뿐만이 아니었다. 내수사에 소속된 수많은 노비들도 다른 노비들에 비해 의무가 가벼웠다. 이에 따라 사노비나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들도 내수사 소속의 노비가 되고 싶어 했다. 게다가 내수사에서는 장리(長利) 활동도 하였다. 내수사 소속의 토지에서 산출되는 곡식을 본전으로 하여 곡식 또는 돈을 꾸어 주고 이자를 받아 재산을 증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종 연간에 내수사 장리가 혁파되면서 왕의 사탕인 내수사의 재산은 크게 줄어들었고 그 결과 내수사 토지 역시 대폭 감소하였다. 그 대안으로 왕비·대비·왕자·왕녀 등에게 궁방전을 분급하였는데, 궁방전 중에서 명례궁·어의궁·용동궁·수진궁 등 이른바 4궁은 내수사와 함께 내탕으로 간주되었다(『현종실록』 2년 6월 3일).

통감부가 설치된 직후 일제는 제실제도정리국(帝室制度整理局)을 설치하여 내수사 및 각 궁의 채무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제실제도정리국은 제도국(制度局)을 거쳐 각궁사무정리소(各宮事務整理所)로 이어졌는데, 이 각궁사무정리소에서 1907년 2월 24일자로 내수사와 4궁을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까지 이어지던 왕 사유재산인 내탕은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수환, 『조선전기 왕실재정연구』, 집문당, 2000.
  • 정현재, 「鮮初 내수사 노비고」, 『경북사학』 3, 경북사학회, 1981.
  • 지승종, 「조선초기 내수사의 성격과 내수사 노비」, 『한국학보』 40, 일지사, 1985.
  • 한은자, 「성종-중종조 내수사 長利에 대하여」, 『崇智苑』, 수도여자사범학교(상명대학교), 1967.
  • 한춘순, 「명종대 왕실의 내수사 운용」, 『인문학연구』 3,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99.
  • 조영준, 「19세기 왕실재정의 운영실태와 변화양상」,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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