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점(朴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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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2년(중종 27)~ 1592년(선조 25) = 61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자는 경진(景進)이고, 호는 복암(復庵)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세정(朴世貞)이며, 어머니 장수 황씨(長水黃氏)는 황순(黃純)의 딸이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이임(李任)의 딸이다. 박순(朴淳), 이이(李珥)와 교분이 두터웠다.

선조 시대 활동

1569년(선조 2) 나이 38세 때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70년(선조 3) 5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573년(선조 6) 3월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이 되고,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12월 명천현감(明川縣監)이 되었다. 1577년(선조 10) 직제학(直提學)이 되고, 1578년(선조 11) 6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이 되었다. 1580년(선조 13)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가 참지(參知) 등을 거쳐 1584년(선조 17) 1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1585년(선조 18)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가 4월 하순에 도승지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 11월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591년(선조 24)에 붕당정치(朋黨政治)에 휘말려 서인(西人)이 몰락할 때 관직을 삭탈당하여 벼슬길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성품과 일화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도승지가 된 기록에 사관이 주를 달아서 “일찍부터 겉을 꾸미는 것만을 일삼아 집안에서의 행실에는 일컬을 만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헛된 명예가 지나치게 높아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쳤다. 학식은 텅 비었고 재기는 노둔하며, 또 박순의 무리와 결탁하여 그 심복이 되어 서로 추대함에 힘입어 오래도록 청반(淸班)에 있으면서 명기(名器)를 욕되게 하였다. 이번에 은대(銀臺)의 장(長)에 제수되자 물의가 시끄러웠다.”라고 논평하였다.[『선조실록』선조 18년 4월 26일] 그리고 그가 명천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사헌부에서 그가 “오활하고 옹졸하며 적을 방어할 무재(武才)가 없으니 체직하소서.”라고 임금에게 청하였다.[『선조실록』선조 7년 2월 20일]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