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李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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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9년(세조 5)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이자, 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의 외손자. 시호는 문량(文良)이며, 본관은 개성(開成)이다. 아버지는 계천위(啓川尉)이등(李䔲)이고, 어머니는 태조이성계의 딸 의령옹주(宜寧翁主)이다. 할아버지는 이개(李開)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차감(李次瑊)이다.

세종 때의 활동

이성계의 외손이었던 이선이 1432년(세종 14) 과거에 응시하려 하자 사간원(司諫院) 관원들은 그가 선왕의 서얼이며 이미 벼슬이 3품에 이르렀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의 응시를 정지시킬 것을 상소하였다.(『세종실록』 14년 4월 4일),(『세종실록』 14년 4월 5일) 그러나 세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결국 이선은 이 해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으로부터 쌀 10석을 하사받고,(『세종실록』 14년 4월 15일)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14년 4월 18일)

1434년(세종 16) 8월 병조 좌참의(左參議)에 제수되었고,(『세종실록』 16년 8월 17일) 같은 해 10월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세종실록』 10월 30일 3번째기사], 12월에는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16년 12월 2일) 이듬해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찬집관으로 참여하였으며,(『세종실록』 17년 6월 8일) 12월에는 중추원(中樞院)동지사(同知事)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17년 12월 3일) 1436년(세종 17)부터는 예조 참판(參判)으로 재직하였으며(『세종실록』 18년 5월 6일) 이듬해인 1437년(세종 18) 9월 중추원 부사(副使)로 임명된 후(『세종실록』 19년 9월 25일)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나라를 다녀왔다.(『세종실록』 19년 12월 24일),(『세종실록』 20년 1월 6일)

1438년(세종 20) 형조 참판(參判)을 거쳐(『세종실록』 20년 3월 6일)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재직하며 공법(貢法)의 시범시행을 진두지휘하였고,(『세종실록』 21년 5월 4일) 김해 읍성에 있던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능침에 표석을 세우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1년 10월 4일) 이듬해 한성부윤(漢城府尹)(『세종실록』 22년 9월 11일), 병조 참판을 거쳐(『세종실록』 22년 12월 3일) 공조 참판으로써 북경(北京)에 다녀왔다.(『세종실록』 23년 2월 22일) 5월에 북경에서 돌아온 후(『세종실록』 23년 5월 26일)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며,(『세종실록』23년 7월 2일) 9월부터는 집현전 학자인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 등과 함께 『명황계감(明皇誡鑑)』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23년 9월 29일)

예조 참판, 한성부사(漢城府事), 돈녕부(敦寧府)지사(知事)를 거쳐(『세종실록』 23년 11월 2일),(『세종실록』 24년 6월 19일),(『세종실록』 25년 9월 12일)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임명된 이선은 1444년 봄 경기도 지역 기근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여 문책을 당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5년 10월 4일),(『세종실록』 26년 5월 5일),(『세종실록』 26년 6월 10일) 1445년(세종 27) 이선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임명되었으며,(『세종실록』 27년 1월 24일) 이듬해 호조 판서(判書)중추원(中樞院)지사(知事)를 거쳐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세종실록』 29년 4월 18일) 개성부유수로 재직할 당시 직권을 남용했던 일이 발각되어 파면당하였다.(『세종실록』 29년 윤4월 7일)

이후 다시 중추원 부사와 중추원 지사, 돈녕부 지사가 되었다가 1450년(세종 32)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중추원 지사로 명나라에 가서 임금의 서거를 알리고 시호를 청하였다.(『세종실록』 32년 2월 22일),(『세종실록』 32년 2월 26일)

문종~세조 시대 활동

북경에서 돌아온 이후 이선은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 과거 장오죄(贓汚罪)를 범하였기에 공조 판서의 직임이 적당하지 않다는 의정부의 비판을 받자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7월 9일),(『문종실록』 즉위년 7월 10일) 문종이 이선을 다시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에 임명하자 신숙주(申叔舟)가 또 다시 이를 반대하였으나 문종이 윤허하지 않았다.(『문종실록』 즉위년 7월 16일),(『문종실록』 즉위년 7월 19일)

단종(端宗) 즉위 후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황주선위사(黃州宣慰使)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돈녕부 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단종실록』 즉위년 7월 21일),(『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1459년(세조 5) 함길도에서 돌아오다가 큰 비를 만났는데, 고산역(高山驛) 앞 냇가를 지나다 아들이 먼저 물에 빠지자 이를 구하려고 하다가 따라서 물에 빠져 죽었다.(『세조실록』 5년 6월 20일) 세조로부터 문량(文良)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성품과 일화

이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선이 젊었을 시절 전 지평주사(知平州事)평득방(平得邦)의 딸과 혼례를 치루기로 약속이 되었다가 평득방이 이선의 집이 가난하다며 혼인을 거절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을 전해들은 세종은 평득방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문초하라는 명을 내렸다.(『세종실록』 1년 2월 20일) 또 이선의 과거 응시에 대해 신료들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도 세종은 대신들의 뜻을 거부하는 등 이선에 대한 총애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 관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선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동료와 부하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자 세종은 그에 대해 녹만 받고 일은 맡기지 말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9년 4월 18일),(『문종실록』 즉위년 7월 29일)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