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안성(尹安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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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2년(중종 37)∼1615년(광해군 7) = 74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병조 참판(參判)을 지냈고, 봉작은 파양군(坡陽君)이다. 자(字)는 계초(季初)이고, 호(號)는 의관(宜觀) 또는 명관(冥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윤부(尹釜)이고,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여산 군수(礪山郡守)이사권(李思權)의 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2년(선조 5) 나이 31세에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1573년(선조 6) 성균관(成均館)에 보직되었다가, 평양 교수(平壤敎授)가 되었고, 이듬해에 성환 찰방(成歡察訪)으로 전임되었다. 1577년(선조 10) 봉상시(奉常寺)의 직(直)을 겸하였는데, 1579년(선조 12) 파직되었다. 1581년(선조 14) 전적(典籍)으로 전임되었다가, 1582년(선조 15) 포천 현감(抱川縣縣)에 임명되었다.[『백헌집(白軒集)』 권48 「병조참판 파양군 증 이조판서 윤공 묘지명(兵曹參判坡陽君贈吏曹判書尹公墓誌銘)」, 이하 「윤안성 묘지명」 약칭]

1583년(선조 16) 유장(儒將)인 그는 복병장(伏兵將)으로서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고(『선조실록』 선조 16년 8월 2일) 1585년(선조 18) 형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586년(선조 19)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으며, 평양부 서윤(平壤府庶尹)과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거쳐서 1589년(선조 22)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임명되었다.[『백헌집』 권48 「윤안성 묘지명」]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면서 그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었다. 왜적이 진격해 오자 경상도 병마사이각(李珏)은 안동으로 도망가서 당시 안동 판관(安東判官)이었던 윤안성과 함께 성을 지켰다. 그러나 왜적이 몰려오자 이들은 성을 버리고 서산으로 물러났다. 이후 남원 부사에 임명된 윤안성은 왜란으로 혼란한 틈을 타 난민(亂民)들이 관창(官倉)을 부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자, 이를 진압시키고 남원을 사수할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순안(順安)의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가게 되었고, 김명원의 추천으로 숙천 부사(肅川府使)에 임명되었다. 김명원은 그를 중후영장(中後營將)으로 삼아 용인에 진을 치게 하였다. 밤중에 김명원 등이 도망하자 밤낮을 말을 달려 숙천에 돌아와 전심전력을 다하여 흩어진 군졸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그러나 판관과 부사를 역임하면서 적군의 침입을 막지 못하였고, 관리가 허술하여 관고(官庫)를 탕진시켰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1594년(선조 27)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거쳐서, 제용감(濟用監)정(正)에 임명되었다. 1595년(선조 28) 군기시(軍器寺)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거쳐서, 온성 부사(穩城府使)가 되었다. 이때 여진족 1천여 기(騎)가 변민(邊民)을 노략질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그가 이들을 격파하고 선정을 베풀어 상을 받고 1년간 더 유임되었으며, 1596년(선조 29) 11월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임명 되었다.[『선조실록』선조 28년 5월 8일, 선존 29년 11월 6일] 1599년(선조 32)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1601년(선조 34)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으며, 이어 경주부 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다. 1602년(선조 35)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었으며, 1603년(선조 36) 해주 목사(海州牧使)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거쳐서,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8년 6월 20일 · 12월 3일]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서, 이듬해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 2) 형조 참판이 되었고, 이듬해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역임한 뒤, 1613년(광해군 5) 익사 공신(翼社功臣)으로 책록되고 파양군(坡陽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재직 중 대북파(大北派)가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하기 위하여 조작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관련되어 파직당하였다. 그 후 1615년(광해군 7) 광해군의 시기를 받던 능창군(陵昌君)이전(李佺)의 추대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사형당하였다.

성품과 일화

윤안성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질이 정결한 것을 좋아하여 방석이나 오궤(烏几) 등에 먼지 한 점이 끼지 않았으며 한가히 지내면서는 소나무와 대나무 심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아무리 친하고 오래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존귀하게 된 뒤에는 그의 문전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함에는 한결같이 성실하게 하여 그 사람이 미천(微賤)하다고 하여 홀대(忽待)하는 일이 없었다. 매번 등조(登朝)할 때에, 반드시 첫 닭이 울면 집을 나섰는데 사람들이 너무 이르다고 하면 말하기를, “나의 선군(先君)께서 등조할 때에는 반드시 별빛이 있을 때에 하셨는데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백헌집』 권48 「윤안성 묘지명」]

그는 시(詩)에 능하였는데 운격(韻格)이 청경(淸警)하였다. 글을 지을 때에는 진부(陳腐)한 말은 쓰지 않았는데, 옛 글을 읽다가 역사(歷史)의 위망처(危亡處)에 이르거나 남의 충의(忠義)를 보면 비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평생 동안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와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 읽기를 좋아하여 좌석의 좌우에 붙여놓고 생각나면 읊조리곤 하였다. 저서로는 『명관유고집(冥觀遺稿集)』(혹은 『의관유고집(宜觀遺稿集)』)가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황해도 강음현(江陰縣) 남쪽 춘명산(春明山)의 선영(先塋)에 있고,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백헌집(白軒集)』 권48 「병조참판 파양군 증 이조판서 윤공 묘지명(兵曹參判坡陽君贈吏曹判書尹公墓誌銘)」] 부인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강금(姜䃢)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다. 1남 윤정(尹淨)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고, 2남 윤서(尹漵)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고, 3남 윤전(尹瀍)은 현감(縣監)이다. 1녀는 현령(縣令)남이걸(南以傑)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선고(淸選考)』
  • 『백헌집(白軒集)』
  • 『간이집(簡易集)』
  • 『난중잡록(亂中雜錄)』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서애집(西厓集)』
  • 『석주집(石洲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음집(淸陰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미암집(眉巖集)』
  • 『국간집(菊磵集)』
  • 『약포집(藥圃集)』
  • 『팔곡집(八谷集)』
  • 『월정집(月汀集)』
  • 『학봉집(鶴峯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서애집(西厓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태촌집(泰村集)』
  • 『오봉집(五峯集)』
  • 『약봉유고(藥峯遺稿)』
  • 『추탄집(秋灘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소곡유고(素谷遺稿)』
  • 『해석유고((海石遺稿)』
  • 『후계집(後溪集)』
  • 『임연재집(臨淵齋集)』
  • 『병산집(屛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