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정(朴基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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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48년(영조 24)~미상]. 조선 후기 정조~순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참판(參判)이다. 자는 일여(一如)이고,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아버지 박광주(朴光冑)가 박성원(朴聖源)에게 입양되어, 박기정의 양조부는 박성원이고, 생조부는 박성준(朴聖俊)이다. 어머니는 해주정씨(海州鄭氏)는 군수(郡守)정운채(鄭運采)의 딸이다. 사육신(死六臣)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음보(蔭補)로 1776년(정조 즉위) 남부도사(南部都事), 용궁현감(龍宮縣監) 등을 맡았다가 1784년(정조 8) 정시(庭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785년(정조 9) 1월 무렵 정언(正言)이 되었고, 5월 지제교(知製敎)에 선발되었다. 1786년(정조 10)부터 1790년(정조 14)까지 교리(校理)·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 등을 역임하였으며, 1791년(정조 15) 3월 부사(府使)에 제수되었다. 1793년(정조 17) 8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1794년(정조 18) 2월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며 4월에 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796년(정조 20) 5월 이의준(李義駿)·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장릉지(莊陵誌)』를 교정하여 『장릉사보(莊陵史補)』를 편찬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있다가 1799년(정조 23) 4월 병조 참판(參判)에 제수되었으며 그 해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8월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는데, 태조가 말달리기를 하던 곡산(谷山)의 치마도(馳馬道) 옛 터를 고증하여 많은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 3월 감영의 사옥 축조를 위해 고을에 민폐를 끼쳤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그는 사육신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정조로부터 총애를 받아 1791년 특별히 영월부사(寧越府使)에, 1799년에는 병조 참판 등에 제수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글씨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가 쓴 「장릉영천비(莊陵靈泉碑)」, 「관풍헌중수기(觀風軒重修記)」, 「육신사기(六臣祠記)」 등이 전한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강한집(江漢集)』
  •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