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도(馳馬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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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 태조이성계가 무예를 익혔던 황해도 곡산에 비석을 세웠던 유적지.

개설

치마도는 황해도 곡산부에 위치한 곳으로 태조이성계가 무예를 연마하던 유적 중 한 곳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곡산은 신덕왕후 강씨의 사제(私第)가 있던 곳이기도 하여 태조와 관련된 유적이 산재한 곳이다. 1799년(정조 23) 황해도관찰사박기정의 장계를 계기로 비석이 세워졌다.

내용 및 특징

정조는 치세 중반 이후부터 태조의 사적을 기리는 기념비적 행사를 추진했다. 1795년(정조 19) 태조와 선조가 머물렀던 정주(定州) 달천(㺚川)의 옛터에 비석을 세우고 사적(事蹟)을 기록하였다. 당시 정주의 유학(幼學)고인기(高仁基)가 정주 달천이 태조가 개선한 곳인 동시에 선조가 행차를 머물렀던 사적지라고 상소한 결과였다. 또한 1797년에 정조는 함흥독서당(讀書堂)의 치마대(馳馬臺) 옛 터에 사적비(事績碑)의 비문을 직접 작성하였다. 독서당 치마대는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했던 터였다. 정조는 태조의 공적을 직접 짓고 써서 승지이익운(李益運)에게 전하여 함흥에 가서 새겨 넣게 하였다. 따라서 치마도가 탄생한 것도 정조가 태조의 공덕을 기리는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다.

치마도에 대한 관심은 1799년(정조 23) 황해도관찰사박기정이 곡산부 일대 치마도의 옛터를 살펴보고 올린 장계가 계기가 되었다. 장계에서 박기정은 곡산부에서 북쪽으로 150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람산(岢嵐山)을 가리켜 황해도 지방 여러 산 중에 으뜸이고 경기와 강원, 서북 지역을 포함한 5도의 요충지라 하면서, 가람산 중앙으로 한 줄기 큰 능선이 뻗어 나와 길이가 2~3리 정도에 너비 150~160보 가량 되는 평탄한 곳이 있는데 세속에서 이곳을 태조의 치마도라고 한다고 보고하였다〔『정조실록』정조 23년 8월 29일〕. 박기정은 이때 인근의 태조의 유적인 성조성(聖祖城)과 속칭 수라천(水刺泉)이라고 하는 용연(龍淵) 등을 그린 그림을 함께 올렸다.

변천

박기정의 보고를 접한 정조는 2일 후인 9월 1일 전교를 내려 이를 기념하기 위한 방안으로, 옛터에서 가까운 지역의 바위에 새겨 기록하거나 아니면 남동향의 위치에 ‘치마기(馳馬基)’라는 글자를 돌에 세기는 것이 어떤가라는 의견을 제시하며 과거 함경도에서 했던 사례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정조실록』정조 23년 9월 1일〕. 이후 어필(御筆)이 작성되어 전 승지인 윤동만과 곡산부사조덕윤 등이 비석을 세우는 문제를 협의하였으며, 치마도 터의 중앙에 위치한 바위를 비석 받침돌로 하고 비석의 몸돌은 다른 곳에서 채취하여 9월 15일 글자를 새겨 9월 16일에 비석을 세웠다. 〔『정조실록』정조 23년 9월 16일〕.

참고문헌

  • 『承政院日記』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