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 이비(敬寧君 李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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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2년(태종 2)∼1458년(세조 4) = 57세]. 조선 전기 태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서출 8남 13녀 중에서 제 1왕자. 봉작(封爵)은 경녕군(敬寧君)이고, 시호는 제간공(齊簡公)이다. 자는 정숙(正淑)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과 충주이다. 어머니는 김효빈(金孝嬪)이다. 부인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참의(參議)김관(金灌)의 딸인데, 아들 넷을 낳았다.

참고(慘苦) 사건

1402년(태종 2) 12월에 태어났다. 김효빈은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몸종이었는데, 태종의 아이를 임신하자, 원경왕후가 분노하여 궁중에서 왕후의 친정집[閔家]으로 내보냈다. 이때부터 원경왕후와 태종의 갈등 관계가 시작되었다. 태종이방원은 원래 왕후의 아버지 민제(閔霽)의 제자였는데, 스승을 존경하여 그 딸과 혼인하였다. 이방원은 <제 1차 왕자의 난>과 <제 2차 왕자의 난> 때 왕후의 격려와 처남 민무구(閔無咎) ·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1400년 태종이 즉위한 다음에 태종이 후궁을 얻자, 원경왕후는 크게 반발하였다. 또 민무구 형제의 전횡(專橫)도 점차 심해졌다. 원경왕후의 오빠 민무구 · 민무질 형제는 태종 왕자들 사이에 난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임신한 여종 김씨를 한겨울철에 집에서 내쫓았다. 혹한(酷寒)에 문 밖에서 출산한 김씨와 그 아들은 얼어 죽을 뻔하였다.(『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15년 12월 15일) 이것을 <참고(慘苦) 사건>이라고 한다. 후일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대간으로 하여금 민무휼 형제를 <참고 사건>으로 탄핵하게 하고 그들을 죽이는 빌미로 삼았다.

1404년(태종 4) 태종은 원경왕후가 낳은 4남 4녀 중에서 맏아들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왕가(王家)에서는 적서(嫡庶)의 구분이 없어서 궁녀가 낳은 서자(庶子)도 왕이 될 수 있었다. 태종이 <참고 사건>을 알게 된 것은 세자를 책봉한 뒤였으므로, 경녕군을 낳고 궁중으로 돌아온 김효빈은 비록 여종 출신이었으나 성품이 착하였으므로, 원경 왕후를 위하여 이 사실을 숨기고 태종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격노하여 원경왕후에게 친정집과의 왕래를, 민무구 형제에게 중궁전(中宮殿)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1407년(태종7) 세자의 혼처(婚處)를 정하는 문제 때문에 민무구 형제가 비밀히 중궁전으로 들어가서 왕후와 만나서 혼사 문제를 의논하다가 발각되어, 이른바 <민무구 · 민무질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대역(大逆) 죄인으로 몰아서 연안(延安)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이때 이 일을 맡아서 비밀히 처리한 사람이 도승지황희(黃喜)였다.

그 후에 4개월이 지나서, 중궁전의 원경왕후가 태종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친정의 아버지 민제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친정과 내통한 사실이 밝혀져서 원경왕후도 폐위를 당할 곤경에 빠졌다. 태종은 장인 민제가 자기의 스승이었고, 또 장모 송씨(宋氏)의 자정(慈情)을 고려하여, 왕비를 폐위시키지는 않았다. 태종은 원경 왕후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여러 후궁들로부터 서출 8남 13녀를 낳았는데, 이때부터 1418년(태종 18) 왕후가 낳은 막내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이 천연두에 걸려서 갑자기 죽을 때까지 태종과 왕후는 13년 동안 같은 궁전 안에 살면서 서로 조면(阻面)하고 살았다. 1410년(태종 10)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사형에 처할 때, <협유집권(挾幼執權> 곧 이들이 어린 세자 양녕대군을 끼고 권력을 잡겠다고 꾀했다는 등 10여 가지 죄목을 열거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민무구 형제가 일찍이 김효빈과 경녕군을 사지(死地)로 몰아낸 죄를 벌주는 성격이 강하였다. 민무구 옥사는 태종이 외척(外戚)의 발호를 막으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으나, 이 사건은 세자 양녕대군이 자라면서 아버지 태종에게 반항하여 일탈(逸脫)된 행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경녕군이비가 태종의 서출 왕자 가운데 제일 맏아들로서 태어났기 때문에 <참고 사건>을 겪었던 것이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1414년(태종 14) 이비가 13세 때에 정윤(正尹)이 되고, 그해 10월에 원윤(元尹)으로 승품(陞品)하여 종부시(宗簿寺)제조(提調)가 되었다. 1416년(태종 16) 2월 이비가 15세 때에 첨총제(僉摠制)김관(金灌)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해 3월 장인인 호조 참의김관이 말에서 떨어져서 세상을 떠났다. 1417년(태종 17) 이비가 16세 때에 정헌대부(正憲大夫) 경녕군에 봉해지고, 부인 김씨는 경신택주(敬愼宅主)에 봉해졌다.

1419년(세종 1) 경녕군이비가 18세 때에 명(明)나라 사신 태감(太監)황엄(黃儼) 등이 조선에 왔을 때, 태평관(太平館)에서 중국 사신을 잘 접대하였다. 그때 황엄이 경녕군의 의젓한 모습을 보고, 왕자를 선발하여 명나라 황제 성조(成祖)영락제(永樂帝)에게 사은(謝恩)하도록 요청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그를 지목하여 왕자를 사은사로 뽑아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도록 요청할 정도로, 경녕군이비는 잘 생기고 예의범절이 훌륭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해 12월 경녕군이비가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성조(成祖)영락제를 알현하였는데, 영락제는 황금 등 온갖 패물과 『신수성리대전(新修性理大典)』 ·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典)』을 하사하였다.

일찍이 영락제가 연왕(燕王)으로 요동(遼東)의 요양(遼陽)에 있을 때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사신을 가다가 요양에서 머물게 된 태종이방원과 만난 적이 있다. 한편, 대만(臺灣)의 중앙연구원 원장이었던 부사년(傅斯年) 교수는 영락제(永樂帝)의 생모는 고려에서 보낸 공녀(貢女)였다고 주장한다. 영락제는 조선에서 공녀로 보낸 권씨(權氏)를 사랑하여 제 3황후로 삼고, 그 오빠 권영균(權永均)을 명나라 광록경(光祿卿)으로 봉하여 우대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영락제는 조선의 왕자를 부마(駙馬)로 삼을 생각을 했다. 양녕대군과 경녕군이 차례로 명나라에 사신을 갔으나 영락제는 이들을 만나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락제는 명나라 서울을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고 지금의 자금성(紫禁城)을 짓고, 지금의 만리장성을 쌓은 황제다.

1425년(세종 7) 10월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고, 1430(세종 2) 1월 정1품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4월 경녕군 부인(敬寧君夫人) 김씨가 돌아갔고, 1454년(단종 2) 어머니 김효빈마저 세상을 떠났다. 세조가 즉위하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처럼 종친들을 이끌고 어린 단종을 죽이자고 상소하는 것이 싫어서, 서울을 등지고 부인 김씨의 고향 충주(忠州)로 내려와서, 부인의 무덤을 지키면서 여생을 보냈다. 1458년(세조 4) 9월 9일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어서 부인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히었다.

성품과 일화

경녕군은 태어날 때 옥상에 백룡(白龍)이 도사리고 있는 형상이 나타나서 궁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현인(賢人)이 태어날 징조라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이것은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한데, 경녕군은 궁중에서 태어나지 않고 원경왕후의 친정집 사가(私家)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에서는 백룡(白龍)은 선신(善神)이고, 흑룡(黑龍)은 악신(惡神)인데, 태조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함흥(咸興)의 적호(赤湖)에서 백룡과 흑룡이 싸우는 것을 보고 활로써 흑룡을 쏘아서 잡았기 때문에 왕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는 경녕군이 태종의 서출 제 1왕자이므로, 그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실록에 보면, 경녕군은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고 특히 세종에게 충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세종충녕대군은 경녕군보다 나이가 5세가 많았는데, 비록 배다른 동생이었지만, 충녕대군은 글을 좋아하는 경녕군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서로 형제의 의리를 굳게 다졌다. 이에 비하여 세자 양녕대군은 어머니 원경왕후가 싫어하는 경녕군을 못살게 굴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태종은 충녕대군을 칭찬하고 양녕대군을 야단쳤다. 왕자 시절에 경녕군을 둘러싸고 양녕대군과 충녕대군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는데, 실록을 보면, 형제자매들이 모인 연회 석상에서 세자 양녕대군이 자매들에게 아버지가 충녕대군만을 좋아한다고 불평하는 기록이 보인다.

1423년(세종 5) 경녕군이 기생 일타홍(一朶紅)을 사랑하여 가정불화가 일어났다. 대간(臺諫)에서 여러 차례 경녕군을 탄핵하였으나, 그때마다 세종이 경녕군을 감싸주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세종이 승하한 뒤에 세종이 세손(世孫)으로 지정한 단종에 대한 충성이 바로 세종에게 충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처가(妻家)가 있는 충주로 낙향하여, 서울과 왕래를 끊고, 충주에서 여생을 보냈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묘소는 『선원강요(璿源綱要)』에는 충청도 충주 황금산(黃金山)에, 『선원계보(璿源系譜)』에는 충청북도 중원군 주덕면 사락리 연곡산에 있다고 한다. 부인은 청풍 김씨김관의 딸인데, 4남을 두었다. 장남은 고양정(高陽正) 이질(李秩)이고, 차남은 은천군(銀川君)이찬(李穳)인데, 이질이 딸만 두고 일찍 죽었으므로, 경녕군의 대종(大宗)이 되었다. 3남은 오성정(梧城正) 이치(李*)이고, 4남은 영성도정(永善都正) 이리(李利)이다. 서출 자녀는 7남 2녀를 두었는데, 1자는 월성수(月城守) 이거(李秬)이고, 2자는 가흥수(嘉興守) 이적(李積)이며, 3자는 복성수(福城守) 이진(李稹)이다. 4자는 모양수(牟陽守) 이식(李稙)이고, 5자는 가림수(嘉林守) 이추(李秋)이며, 6자는 단산수(丹山守) 이수(李穗)이다. 1녀는 정석균(鄭石勻)의 처이고, 2녀는 송계흥(宋繼興)의 처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중종실록(中宗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강요(璿源綱要)』
  • 『선원계보(璿源系譜)』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춘정집(春亭集)』
  • 『청음집(淸陰集)』
  • 「경녕군묘비명(敬寧君墓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