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강대(彎强隊)"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2:2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만강대 |
한글표제 | 만강대 |
한자표제 | 彎强隊 |
관련어 | 공현위(控絃衛), 장용대(壯勇隊), 장용위(壯勇衛), 충무위(忠武衛)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조~성종 |
집필자 | 김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만강대(彎强隊)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8년 6월 22일, 『세조실록』 13년 4월 4일, 『예종실록』 1년 6월 12일 |
조선 초기 왕의 행차 때 시위(侍衛)를 담당하던 특수 군종(軍種).
개설
1458년(세조 4) 4월 병조의 건의로 창설되었는데, 각종 부대의 군사들 중에서 120근의 강궁(强弓)을 쏠 수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편성하였다. 1462년(세조 8)에는 같은 성격의 기병(騎兵)도 창설되었는데, 이를 공현위(控絃衛)라 칭하였다. 만강대와 공현위의 병사들은 보통 때는 각기 자신의 소속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왕의 행차 시에만 소집되어 호위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만강대에는 120근의 강궁을 쏠 수 있는 공·사노비들도 선발하여 참가시켰다. 한편 100근 이상의 강궁을 쏘는 천인만으로 편성한 특수부대가 1459년에 창설되어 장용대(壯勇隊)라 불렸는데, 1467년에는 만강대와 합쳐 1,350명의 정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점차 인원이 줄어 1470년(성종 1)에는 만강대와 장용대를 합쳐 600명의 정원을 두었고, 천인들의 입속을 금지시켰다. 이 두 병종은 곧 장용위(壯勇衛)로 통합, 오위의 충무위(忠武衛)에 속하게 되었다.
내용 및 변천
“제색군사(諸色軍士) 안에 활 1백 20근을 잡아당기는 자는 기병(騎兵)이면 ‘공현위(控絃衛)’라 칭하고, 보병(步兵)이면 ‘만강대(彎强隊)’라 칭하여 평시에는 각각 본위(本衛)에 속하게 하다가 행행(行幸)할 때에는 사자위사대(獅子衛射隊)의 예에 의하여 어가(御駕)를 호종하게 하며, 그 가운데 한산인(閑散人)으로 강궁을 당겨 합격한 자는 자원(自願)에 따라 별시위(別侍衛)·파적위(破敵衛)에 소속시키되, 내금위(內禁衛)·갑사(甲士)로 들어가려는 자도 또한 들어 주소서(『세조실록』 8년 6월 22일)”라는 병조의 건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만강대는 원래 여러 군대에 속한 자로서 보병으로서 강궁을 당기는 자들을 뽑아 평소에는 본래의 부대에 속해 있다가 왕의 행행 시에만 특별히 어가를 시위하도록 편성한 임시 부대였다.
한편 이러한 만강대에 천인(賤人)들도 입속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병조에서 아뢰기를, “천인으로서 강궁 120근을 당기는 자는 만강대에 소속시키고 6품에서 거관(去官)시키되, 강무(講武)·타위(打圍)·순수(巡狩)와 같은 때 말을 타고 따르는 자는 하루에 사(仕) 5를 주고, 걸어서 따르는 자는 사 1을 주소서. 또 관사(觀射)할 때에 100보(步)에 있는 과녁[侯]을 맞히는 자에게는 사(仕) 20을 주고, 관통시킨 자에게는 갑절을 주며, 말을 타고서 쏘아 맞힌 자에게는 매 화살마다 사(仕) 5를 주게 하여 150을 채운 자는 장용대에 소속하게 하고 7품에서 거관(去官)시키며, 해마다 맞힌 수가 가장 많은 자를 가려서 거관하여 종량(從良)하게 하고, 아울러 만강대·장용대 두 대(隊)는 1,350인으로써 액수(額數)를 삼아 15분의 1인 90은 체아직(遞兒職)을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조실록』 13년 4월 4일)”라는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만강대에 천인이 입속할 수 있게 되자 차츰 만강대는 천인 군종으로 변해갔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 양인들이 천인들이 있는 부대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만강대는 처음에는 임시로 편성한 부대였으나 차츰 독립된 상설 병종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것은 예종 때 “갑사(甲士)·파적위(破敵衛)·만강대·장용대·신량정병(新良正兵)과 첩자(妾子) 등은 그 본계(本系)가 매우 천한 자들이다(『예종실록』 1년 6월 12일)”라는 한명회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이 시기에 이르러 만강대는 갑사나 파적위와 같은 독립된 병종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후 1470년(성종 1)에는 세조 때 확대된 군액을 축소하는 조치에 따라 만강대와 장용대를 합쳐 정원을 600명으로 줄이고 다시 장번(長番) 근무로 바꾸었다. 이후 만강대라는 용어가 사료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만강대는 이때 장용대에 흡수·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장용대는 1475년(성종 6)에 양인 병종인 ‘장용위’로 개편되었다.
의의
만강대는 처음에는 여러 군대에 속한 보병 중에서 정예병만을 모아 왕의 행차 시에 호위하는 임시 편성 부대였으나, 곧 상설 부대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후 천인들도 입속할 수 있게 하자 천인 부대로 바뀌어 장용대에 흡수·통합되었다가 사라지게 된다.
참고문헌
- 閔賢九,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韓國硏究院, 198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