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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外戚)·외손(外孫) 등을 예우하기 위한 관서.

개설

1414년(태종 14) 태조의 후예가 아니며 봉군(封君)되지 않은 종친, 외척과 외척의 여러 성, 왕실의 외손을 예우하는 관서로 설치하였다. 1457년(세조 3) 혁파되었다가 1470년(성종 1) 다시 설치되어 『경국대전』에 정1품 아문으로 등재되었다. 예우하는 대상과 규모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속 당하관이 조금 줄어들었고, 1894년(고종 31) 종정부(宗正府)에 병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 초기에는 태조의 후예가 아니며 봉군되지 않은 종친과 외척, 외척의 여러 성과 왕실의 외손이 소속된 곳이나 맡은 일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1414년 돈녕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이들을 예우하여 친척을 친애하는친친(親親)의 도를 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왕실과 외척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되, 관직에서 소외된 그들에게 녹(祿)을 주어 예우하기 위한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왕친(王親)과 외척의 관부로 규정하였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태종은 1400년(정종 2) 사병을 혁파하고 이어 종친과 부마(駙馬)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다시 천명하였다.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육조(六曹)에서 직접 왕에게 보고[直啓]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킨 태종은 1409년 외척에게도 봉군하던 것을 없앴다. 1412년 10월에는 왕실 족보를 태조-태종으로 이어지는 왕실 직계의 선원록(璿源錄), 왕실 방계의 종친록(宗親錄), 왕실의 딸과 외손 및 서얼의 유부록(類附錄)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1414년 1월 관제를 고치면서 맡은 일이 없는 예우 기관으로 돈녕부를 두어 왕실의 구성원이면서 관직에 임용되어 녹봉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예우하였다.

태종대 돈녕부를 두어 순수한 예우아문(禮遇衙門)이 성립하였다. 예우아문이란 실제 직무는 없지만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로, 돈녕부를 비롯해 종친부·의빈부·중추부를 말한다. 이것은 고려 말 왕실내혼(王室內婚)을 금지하여 나타난 왕실 구성의 변화, 조선 초에 행정 체계의 효율적 정비와 인사 관리 제도의 합리화와 짝을 이룬 제도의 변화였다. 당시에는 왕실·외척을 일반 관서에 임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지배층 내부의 관직 경쟁이 심했는데, 예우아문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결과였다. 신분 자체에 근거한 우대가 약해지고 직무 성적으로 관원의 인사를 관리하자, 왕실과 연결된 일부 집단을 예우하는 관서를 따로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직 및 역할

1414년의 관원은 정1품 영사(領事) 1명, 종1품 판사(判事) 1명, 정2품 지사(知事) 2명, 종2품 동지사(同知事) 2명, 정3품 첨지사(僉知事) 2명, 종3품 동첨지사(同僉知事) 2명, 정4품 부지사(副知事) 2명, 종4품 동부지사(同副知事) 2명, 정5품 판관(判官) 2명, 정6품 주부(主簿) 2명, 정7품 승(丞) 2명, 정8품 부승(副丞) 2명, 정9품 녹사(錄事) 2명이었다.

돈녕부는 태조의 후손이 아니며 봉군되지 않은 종친, 외척과 외척의 여러 성, 왕실의 외손 등을 예우하는 관서로 설치되었다. 동지사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상참(常參) 등에 참여하였다. 돈녕보첩(敦寧譜諜)의 편찬을 주관하며, 이를 보각(譜閣)에 봉안하고 관리하는 일도 주관하였다.

변천

1422년(세종 5)에 첨지사에서 주부까지 1명씩을 줄였다. 이듬해는 조계(朝啓)에 참여하지 않던 돈녕부의 관원도 윤대(輪對)하였다. 1430년에는 반차(班次)를 서반으로 옮기며, 의정부와 맞서는 것을 피하려고 영돈녕부사를 없애 종1품 아문으로 삼았다. 이때 입직과 생기(省記)는 이전대로 이조(吏曹)에서 관장하였다. 1437년에는 돈녕부에 임용하는 친척의 범위를 촌수로 제한하여 종성(宗姓)은 단문(袒免) 이상과 6촌 자매 이상의 지아비까지, 왕비는 6촌 이상과 4촌 자매 이상의 지아비까지, 이성(異姓)은 4촌 이상과 3촌 질녀 이상의 지아비까지, 왕세자빈의 친아버지까지를 그 대상으로 하였다. 1442년에는 왕실의 친족 임용을 돈녕부가 관장하도록 하면서, 돈녕부에는 반드시 유복친(有服親)을 임용하도록 하였다.

문종이 친진(親盡)한 이들은 2년 동안은 그대로 임용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단종대에도 지켜졌다. 세조대인 1457년(세조 3)에는 왕통(王統)이 세종-문종-단종에서 세종-세조로 바뀌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사육신 사건의 여파로 돈녕부의 관원을 모두 없앴다.

돈녕부는 1470년(성종 1) 4월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그때의 관원이 그대로 『경국대전』에 실렸다. 『경국대전』에는 영사 1명, 판사 1명, 지사 1명, 동지사 1명, 정3품 당상 도정(都正) 1명, 정3품 당하 정(正) 1명, 종3품 부정(副正) 1명, 종4품 첨정(僉正) 2명, 종5품 판관 2명, 정6품 주부 2명, 종7품 직장(直長) 2명, 종8품 봉사(奉事) 2명, 종9품 참봉(參奉)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우 범위는 더 제한되어 종성 9촌 이상, 이성은 6촌 이상, 왕비의 동성 8촌 이상과 이성 5촌 이상, 세자빈의 동성 6촌 이상과 이성 3촌 이상 그리고 위의 촌수 안에서 고모·자매·질녀(姪女)·손녀의 남편[夫]이었다. 선왕(先王)·선후(先后)의 친척도 같았다. 대군의 사위와 공주의 아들에게는 종7품을 처음 제수하고, 공주·왕자군(王子君)의 사위와 옹주(翁主)의 아들에게는 종8품을 처음 제수하였다. 대군·왕자군의 양첩(良妾) 사위는 각각 한 등급을 낮추고, 천첩(賤妾) 사위는 한 등급을 더 낮추도록 하였다.

1478년에는 돈녕부를 중추부·의빈부와 함께 조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성종 후반부터 돈녕부 관원 중 쓸 만한 이들을 동반(東班)에 서용하도록 하였다.

돈녕부 관원을 동반에 서용하는 것을 연산군대에 들어 대간(臺諫)에서 외척의 등용으로 문제 삼기 시작하였다. 1506년(연산군 12)에는 녹봉을 줄이기 위해 첨정·판관·주부·직장·봉사·참봉 각 1명씩을 없앴다. 『속대전』에는 부정·첨정·직장·봉사가 감원되었으며, 『대전통편』에는 정을 감원하고 직장 1명을 다시 두었다. 그 뒤 1869년(고종 6)에는 종7품 부직장(副直長), 종8품 부봉사(副奉事)를 증설하였으며, 1894년 종정부(宗正府)에 병합되면서 돈녕원(敦寧院)으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왕실과 외척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면서 관직에서 소외된 왕실의 친인척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가 돈녕부다. 돈녕부를 설치한 뒤 종친부와 의빈부를 두어 가까운 왕족, 왕의 사위를 예우하였다.

돈녕부에서 예우하는 외척 등은 공신과 함께 왕권의 핵심 기반이었다. 돈녕부의 최고관인 영돈령부사는 정1품 대신으로 세종 초부터 국정의 논의에 참여하였다. 돈녕부의 당상은 자주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성종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영돈녕부사를 맡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 성종이 차츰 국정을 주도하면서 영돈녕부사 이상의 수의(收議) 관행이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영돈녕은 국정 전반을 듣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 전반의 훈척 정치는 물론, 그것을 비판하며 성립한 붕당 정치기에도 외척 내지 돈녕부의 당상관 비중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 숙종 연간에 잦은 환국으로 외척 내지 돈녕부 당상의 정치적 비중은 커졌으며, 탕평책을 편 영조 후반에는 영돈녕부사가 비변사의 수위(首位) 당상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 위에서 순조 연간 이후 영돈녕부사가 세도(世道)를 책임지는 소위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남지대, 「조선초기 예우아문의 성립과 정비」, 『동양학』24,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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