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록(宗親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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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실의 종자를 수록한 왕실 보첩(譜牒).

개설

『종친록』은 태종이 1412년(태종 12) 10월에 왕실 족보를 『선원록(璿源錄)』·『종친록』·『유부록(類附錄)』 등 삼록(三錄)으로 나누어 작성하도록 하면서 시작된 왕실 보첩의 일종이다. 『종친록』에는 역대 왕의 아들인 대군(大君)군(君)의 자손이 적서 구분 없이 수록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왕실에서 『종친록』을 간행하기 시작한 것은, 1412년 10월에 태종이 이원계(李元桂)와 이화(李和) 등 태조의 서형제(庶兄弟)를 『선원록』에 올리면 후사(後嗣)가 혼동될 것이 염려된다며 왕실 보첩을 3가지로 구분하여 작성하게 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왕실 보첩은 왕실의 조계(祖系)를 서술한 것은 ‘선원(璿源)’, ‘종자(宗子)’를 서술한 것은 ‘종친(宗親)’, 종녀(宗女)와 서얼(庶孼)을을 서술한 것은 ‘유부(類附)’라 하여 3록으로 나누어 작성하였다(『태종실록』12년 10월 26일). 이렇게 작성된 『선원록』·『종친록』·『유부록』은 2부를 작성하여 하나는 왕부(王府)에 간직하고, 다른 하나는 동궁(東宮)에 간직하게 하였다.

1428년(세종 10)부터는 왕실에서 『선원록』은 10년에 한 번 『종친록』과 『유부록』은 3년에 한 번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종부시(宗簿寺)에서는 식년(式年)마다 선원세계단자(璿源世系單子)를 제출 받아서 종실의 보첩을 수정하였다(『세종실록』10년 10월 24일). 이처럼 왕친을 「선원록」·「종친록」·「유부록」 등 3록으로 나누어 수록하였으나, 『종친록』과 『유부록』은 별책으로, 혹은 『종친록』에 『유부록』을 부록으로 합본하여 간행하기도 하였다. 『종친록』에 『유부록』을 부록으로 넣어 간행하게 된 것은 1680년(숙종 6) 6월의 선원록이정청(璿源錄釐正廳)의 건의에 의한 것이다.

구성/내용

『종친록』은 태종이 1412년에 왕실 족보를 『선원록』, 『종친록』, 『유부록』으로 세분하여 작성하도록 하면서 시작되었다. 『종친록』에는 각 왕의 종친 중 성손(姓孫), 즉 왕의 남계(男系) 자손이 수록되었으며, 이때 적서(嫡庶) 모두가 기재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종친록』에는 대군(大君)군(君)의 자손들이 기재되어 있다.

『종친록』의 형태는 『세종대왕 종친록』의 예에서 보면 세종의 남계 자손을 1대마다 한 항씩 내려가며 5대까지 기록하였다. 수록 인물의 이름[名], 출생 년, 봉작 명, 배우자의 본관과 부명(父名) 및 관직 등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첩자(妾子), 즉 첩의 아들인 경우에는 이름, 출생 년, 종반직(宗班職)[종친에게 제수된 관직]을 기록하고, 세주 형태로 모(母)의 신분과 이름, 그리고 배우자의 성씨와 관향, 배우자 부(父)의 이름과 관직을 기록하였다. 혹 배우자의 부가 서얼이면 이를 정확히 밝히었다. 이와 같이 첩자의 경우에 모의 신분과 이름을 기록한 것은 사가 족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제외한 『선원록』 봉안처가 모두 소실되었는데, 이 때문에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소장된 『종친록』은 대부분 1603년(선조 36) 전주사고의 『선원록』을 저본으로 필사한 것이다.

참고문헌

  • 『璿源錄釐正廳儀軌』계사(啓辭) 1680년 6월 4일 4번째 기사
  • 김일환·원창애·홍우의, 『(장서각 소장)왕실 보첩류 목록 및 해제』민속원, 2010.
  • 성봉현, 「장서각 소장 왕실 보첩류의 종류와 현황」, 『한국학논집』44, 2011.
  • 원창애, 「조선 후기 선원보첩류의 편찬 체제와 그 성격」, 『장서각』1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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