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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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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진주진 |
한글표제 | 진주진 |
한자표제 | 晋州鎭 |
상위어 | 주진(主鎭), 병영(兵營), 순영(巡營) |
하위어 | 제진(諸鎭), 속읍(屬邑) |
동의어 | 거진(巨鎭), 진주진관(晋州鎭管), 진주진영(晋州鎭營), 진주토포영(晋州討捕營) |
관련어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진주영장(晋州營將), 진주토포사(晋州討捕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衛), 순찰사(巡察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서태원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진주진(晋州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4년 4월 14일 |
조선시대 경상도 진주목에 설치된 육군 거진으로, 전기에는 진주진관(晋州鎭管), 후기에는 진주진영(晋州鎭營)으로도 불림.
개설
진주진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시행될 때 경상도 육군 거진(巨鎭)으로 설치되었다. 진주진은 진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여 평시에는 제진(諸鎭) 군병을 훈련시키고 점검하되, 유사시에는 진주진관을 중심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과 진관체제(鎭管體制)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혁하는 가운데 진주진영도 설치되었다. 진주진영 군병 수는 『여지도서』에 따르면 9,198명이었다. 진주진영은 속읍(屬邑) 군병의 훈련과 점검을 맡았고, 민란 및 변란 진압과 도적 체포 등 치안도 담당하였다.
진주진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의 진주진은 거진인 진주진관으로서, 군익도(軍翼道)체제를 대신하여 진관체제가 시행되면서 1457년(세조 3)에 설립되었다. 진관체제는 군익도의 ‘도’가 행정구역의 ‘도(道)’와 혼동되는 것을 막고, ‘도’라는 지역적 성격보다 ‘진(鎭)’이 갖는 군사기지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시행된 것이다.
조선후기의 진주진은 진주진영으로서,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육지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지방 수령이 육군의 군사 지휘관을 겸임한 진관체제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즉 정부는 명나라 병서(兵書)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 중심의 삼수병(三手兵)을 육성하고, 군대의 편제도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바꾸었다. 더불어 영장(營將)을 파견하여 수령 대신 군병을 지휘하게 하는 등, 지방군 개편을 1594년(선조 27)부터 시행하는 가운데 진주진영도 설치한 것이다.
조직 및 역할
조선전기의 거진이었던 진주진은 진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여, ‘합천, 초계, 함양, 곤양, 진주, 거창, 사천, 남해, 삼가, 의령, 하동, 산음, 안음, 단성’ 등 제진(諸鎭)의 훈련과 점검을 주도하였고, 유사시에는 제진의 군병을 집결시켜 진주진관을 방어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후기 경상도 우영(右營)이었던 진주진영은, 조선전기의 진주진 역할을 대신하였다. 진주진영의 속읍은 진주진관의 제진과 똑같았다.
군병은 ‘천총 3명, 파총 13명, 마별장 1명, 초관 69명, 기패관 139명, 영장표하군 103명, 장관표하군 851명, 기수군 106명, 취고수 42명, 당보군 34명, 속오마군 466명, 보군 6,229명, 복마군 548명, 화병 594명’ 등 9,198명이었다.
진주진영은 영장이 관할 지역을 순회하면서 속읍 속오군 등의 군병을 훈련시키고 아울러 무기·복장 상태를 점검하였다. 1728년(영조 4) 안동 등지에서 이인좌와 정희량 등이 일으킨 무신란(戊申亂) 때, 경상우도의 반란군을 진압하였다(『영조실록』 4년 4월 14일). 또한 1785년(정조 19)에는 「정감록」 등을 이용하여 백성을 현혹시켜 거사를 꾀하려던 산인집단(山人集團)을 잡기 위해 지리산 동북쪽 바깥을 수색하였다.
진주진영은 1665년(현종 6) 진주영장이 토포사(討捕使)를 겸함에 따라 토포영이 되어 도적 등을 잡았으며, 1885년(고종 22)에는 무덤을 파헤친 화적과 접주를 상주진영의 포교·군졸 등과 함께 체포하였다.
변천
조선전기의 진주진관은 임진왜란 중에 진영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진주진영으로 바뀌었다. 1654년(효종 5) 이후 진주영장의 파견이 확정됨으로써, 진주목사의 속읍 군사 지휘권은 진주영장에게 넘어갔다. 1665년부터 진주진영은 토포영도 겸하였다.
진주진영은 1895년 을미개혁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 『양역실총(良役實總)』
- 『기효신서(紀效新書)』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영장제를 중심으로-』, 혜안, 1999.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서태원, 「조선후기 청주진영연구」, 『호서사학』42,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