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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성천(成川) 지역에 설치한 진관.

개설

조선 초기에 북방 개척에 힘쓰면서 성주군에서 성천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대하던 1457년에 지방 군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했는데, 1458년에 비로소 진이 설치되었다. 약간의 변화를 거쳐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후기에 들어와서도 소속 진들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성주군(成州郡)이었다가 1413년(태종 13) 성천(成川)으로 개칭하고 1415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 그 뒤 군익도가 평안도 전체로 확대되면서 안주도(安州道)의 좌익에 속하였다(『세종실록』 6년 6월 13일). 1455년(세조 1) 양계(兩界)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내륙에도 거진(巨鎭)을 두되, 주변 고을을 나누어 소속시켰다. 이때 개천도(价川道)의 중익(中翼)으로 소속되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군익도체제가 진관체제로 개편되고 주요한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서 주변의 제진(諸鎭)을 그 휘하에 소속시켰다. 처음에는 평양진(平壤鎭)에 속했는데, 1458년 성천이 상류(上流)의 요충지이므로 진을 설치해야 한다는 병조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비로소 성천진이 성립되었다. 동시에 상원(祥原)·삼등(三登)·양덕(陽德)·맹산(孟山)·은산(殷山) 등을 소속시켰다(『세조실록』 4년 11월 30일). 그 뒤 자산·순천이 옮겨오는 등의 부분적인 변화를 거쳐 진관이 확립되었고, 이것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따르면 종3품의 성천도호부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면서 진관을 통솔하되, 소속된 덕천·개천·자산·순천·상원에는 군수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겸하게 하였다. 또한 양덕·맹산·삼등에서는 현령이 겸하였고, 강동·은산에서는 현감이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여 지휘를 받도록 했다. 그리고 중앙에 올라가 대열(大閱) 등을 받을 때에는 오위(五衛)에 소속되는데, 우위(右衛)였던 호분위(虎賁衛)의 우부(右部)에 속하였다.

광해군 때 부사용(副司勇)한교(韓嶠)의 상소에 따르면, 압록강 일대 각 읍을 일위독진(一衛獨陣)으로 만들어 외적을 지키되 본도(本道)의 내지 및 황해도 군사를 합하여 윤번제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변방의 경보에 대비해 안팎에서 서로 구원하고자 성천 등 5개의 진관을 설치하여 오위연진(五衛連陣) 제도를 만들었다. 혹시라도 변성(邊城)이 수비를 못하게 되면 주현의 군민이 각각의 소속 진관에 들어가 방어하도록 했다고 한다(『광해군일기』 3년 3월 29일).

변천

광해군 때 박엽(朴燁)이 5진 대신 7진을 배치하면서 폐지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에 복구되었다(『인조실록』 3년 7월 6일).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진관에는 변동이 없었다.

지방군을 강화하고자 영장제(營將制)를 도입하였으나 전임 영장은 유지 비용이 커서 병자호란 이후 충청·전라·경상도의 하삼도를 제외하고는 수령이 영장을 겸했다. 1740년(영조 16) 겸영장 고을로 정해졌다(『영조실록』 16년 1월 25일). 하지만 『속대전』에서는 순천군수가 겸하는 우영장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 차문섭, 『조선시대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