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엽(朴燁)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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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엽 |
한글표제 | 박엽 |
한자표제 | 朴燁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중기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숙야(叔夜) |
호 | 약창(葯窓)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70년(선조 3) |
사망 | 1623년(인조 1) |
본관 | 반남(潘南)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파주 적성(積城) |
증조부 | 박소(朴紹) |
조부 | 박응천(朴應川) |
부 | 박동호(朴東豪) |
모_외조 | 수안 이씨(遂安李氏): 이주국(李柱國)의 딸 |
처_장인 | (첫째부인)횡성 조씨(橫城趙氏): 조진(趙進)의 딸 (둘째부인)문화 유씨(文化柳氏): 유덕신(柳德新)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엽(朴燁) |
총론
[1570년(선조 3)~1623년(인조 1) = 54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자는 숙야(叔夜)이고, 호는 약창(葯窓)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박동호(朴東豪)이며, 어머니 수안 이씨(遂安李氏)는 이주국(李柱國)의 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97년(선조 30)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01년(선조 34) 2월에 형조 정랑(正郞)이 되고, 그 해 4월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그 해 7월에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이 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602년(선조 35) 3월에 병조 정랑이 되었고, 그 해 5월에 다시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 1603년(선조 36) 7월에 호조 정랑이 되었다가 해남현감(海南縣監)이 되었다. 1604년(선조 37) 윤9월에 다시 형조 정랑이 되었다가 그 해 11월에 예조 정랑이 되었다. 1605년(선조 38) 1월에 평양서윤(平壤庶尹)이 되었고, 1607년(선조 40) 12월에 평산부사(平山府使)가 되었다. 이때 성(城)을 쌓았는데, 이 성은 관서(關西)로 통하는 큰 길을 방어하고 있었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0년(광해군 2) 2월에 황주목사 겸 병마사(黃州牧使兼兵馬使)가 되었고, 1611년(광해군 3) 4월에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이때 그는 형장(刑杖)을 함부로 사용하여 오랫동안 인심을 잃었으므로 온 도내의 사람들이 원수처럼 여겼다 한다. 1612년(광해군 4) 9월에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되었고, 그 해 11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11월에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이때 그는 사람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기묘한 것을 많이 만들어 바쳐 아첨하니, 임금이 그를 총애하였다. 1615년(광해군 7) 2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9월에 성천부사(成川府使)가 되었다. 그가 성천부사가 된 후, 1618년(광해군 10) 7월경까지 사이에 여러 관사(館舍)를 복구하고 성천(成川)에 강선루(降仙樓)를 창건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9월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1623년(광해군 15) 3월까지 6년 동안 평안도 관찰사로서 규율을 확립하고 여진족의 동정을 잘 살펴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므로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
그는 광해군 당시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모욕하고도 무사할 만큼 명망이 있었으나,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던 날인 13일 평양 임지에서 처형되었으니, 나이 54세였다. 그의 처와 자녀는 겨우 모면하였다.
성품과 일화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기록에 의하면, 그는 성품이 잔혹(殘酷)하고 경박하며 패망된 행실이 많았다 하고, 특히 6년간 관서지방에 방백(方伯)으로 있으면서 탐학한 짓으로 재물을 수탈하고 끝없이 사치와 욕심을 부려 개인이 지니고 있는 재물이 내탕고의 재물보다 더 많았으며, 일로(一路)에 해독을 끼쳐 마을이 폐허가 되었다. 그가 효시되는 날에 이르러서는 한 도의 백성들로서 서로 경하하지 않는 자 없었으며, 심지어 그의 관을 쪼개고 시신을 난도질 하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그의 죽음에 관해 기록이 있다. 왕이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오명준(吳命峻)이 구임(久任)에 대한 일로 인하여 진달하기를, “박엽이 10년 동안 평양 감사로 있으면서 사나운 위세로 인심을 진압(鎭壓)시켰는데 병자년(인조 14, 1636)의 난리에 사람들이 ‘박엽이 만일 살아 있다면, 반드시 이익 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근래에는 유상운(柳尙運)이 거듭 서로(西路)를 맡아 또한 남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라고 하자, 검토관(檢討官)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박엽은 잔혹하였으나 재주가 있었는데, 마침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중략)”라고 하였다. 이미 강(講)을 마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태억이 죄로 죽은 사람인 박엽을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미안하다. 이제 일기(日記)를 상고하여 보았더니, 인묘(仁廟: 인조)께서 반정하시던 날 먼저 박엽 등을 베어 인심을 위로하였는데,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을 전석(前席)에서 내게까지 하였으니, 몹시도 놀랍다. 종중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숙종실록』숙종 33년 7월 6일]
묘소와 가족
묘소는 경기도 파주의 적성(積城)에 있다. 첫째 부인 횡성 조씨(橫城趙氏)는 조진(趙進)의 딸이고, 둘째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유덕신(柳德新)의 딸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