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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부터 토지·호구(戶口)·부세(賦稅) 등 국가 재정 관련 업무를 관장하던 관서.

개설

지관(地官), 지부(地部), 탁지(度支)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호조는 고려후기에 설치되었고 조선 건국 직후에 이를 계승하여 설치하였다. 호구와 토지, 부역 등 국가의 재정 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다. 호조 아래에 속사(屬司)로 판적사(版籍司)를 비롯한 3개의 부서를 두었고, 속아문으로 내자시(內資寺) 등을 두었다. 1894년(고종 31)에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호조는 고려말인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이전의 호부·민부(民部) 등을 계승하여 설치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는 문무백관 관제 반포 시에 고려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육조(六曹)의 하나로 설치되었다. 조선 건국 초에는 호조와는 별도로 호조급전사가 있어 토지 관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호조 이외에 재정 담당 관서로 삼사(三司)가 있었다. 삼사는 고려시대 이래 전곡(錢穀) 출납과 전세(田稅), 공부(貢賦) 등의 징수를 관장하는 최고의 관서로, 호조는 삼사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다. 태종 즉위 이후 관제 개혁 과정에서 삼사가 사평부로 개정되었다가, 1405년 혁파되면서 호조는 최고의 재정 기구로 부상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고려말 설치 당시에는 직제가 판사·판서·총랑·정랑·좌랑 등으로 편성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 설치 때는 병조에 준하여 정3품 전서 2명, 정4품 의랑 2명, 정5품 정랑 2명, 정6품 좌랑 2명, 정7품 주사 2명을 두었다.

이후 호조의 조직 정비 과정은 육조의 정비와 맥락을 같이하며 진행되었다. 즉, 1403년(태종 3) 전서 1명이 감축되었다. 1405년에는 정2품의 판서 1명을 설치하는 한편 나머지 전서 1명을 혁파하였다. 대신 좌·우참의를 각각 설치하였다. 동시에 정4품 의랑이 혁파되면서 정랑과 좌랑의 정원이 각 3명으로 증원되었다. 주사는 1395년 2월에 혁파되었다. 이 같은 직제의 정비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문란한 관직 제도를 정비하고 국가 재정을 절감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궁극적으로는 육조의 기능 및 위상을 강화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1416년에는 추가로 종2품의 참판 1명이 설치되는 한편 좌·우로 분리되었던 참의 정원이 1명으로 축소되었다. 이후에도 참판의 정원에 변화가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적인 골격은 유지되다가 『경국대전』에서는 정2품 판서 1명, 종2품 참판 1명, 정3품 참의 1명, 참지 1명, 정5품 정랑 4명, 정6품 좌랑 4명과 함께 기관의 특성에 따라 종6품의 산학교수(算學敎授) 1명, 별제(別提) 2명, 종7품의 산사(算士) 1명, 종8품의 계사(計士) 2명, 정9품의 산학훈도(律學訓導) 1명, 종9품의 회사(會士) 2명 등으로 규정되었다. 이속(吏屬)은 서리 60명, 서사(書寫) 2명, 고직 9명, 사령 35명, 방직(房直) 4명, 군사 8명 등이 배속되었다.

호조는 고려말 설치 이후 민부 등의 업무를 계승하여 관장하였고, 1392년 설치 때는 토지와 호구 및 재용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1405년에는 좀 더 구체화되어 호구와 토지, 전곡(錢穀), 식화(食貨) 등과 공물을 차등적으로 부과하는 일을 관장하도록 규정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호구와 공물, 전곡, 식화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도록 규정되었다. 호조의 업무는 1405년에 제정된 이후, 『경국대전』에 규정된 속사의 업무를 통해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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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판적사는 나라의 토지를 주로 관장하였고, 회계사는 모든 곳의 전곡을 맡았으며, 경비사는 일체의 경비를 맡았다(『연산군일기』 2년 7월 18일).

호조는 명실상부한 국가 최고의 재정 기관으로서, 전세와 화전세(火田稅)·노전세(蘆田稅)·둔전세를 비롯해 노비 신공(身貢)과 공장세(工匠稅)·무녀세(巫女稅) 등을 수입원으로 하였다. 이 가운데 전세가 수입의 대부분이었다.

국가의 경비는 공안(貢案)횡간(橫看)에 의하여 수입과 지출을 정하였다. 공안은 전세를 비롯한 모든 공물과 진상 등을 포함한 세입부이고, 횡간은 왕실과 중앙 관서의 지출 명세서이다. 서울과 지방의 물품 출납 액수에 대한 문서는 모두 호조에 제출하도록 하였고, 호조에서 이를 관리하였다.

호조의 속아문은 1405년 제정 당시에는 전농시·내자시·내섬시·군자감·풍저창·광흥창·공정고·제용고·경시서·의영고·장흥고·양현고·각 도 창고·오부 등 14개 관서로 규정되었다. 이후 『경국대전』에서는 내자시·내섬시·사도시·사섬시·군자감·제용감·사재감·풍저창·광흥창·전함사·평시서·사온서·의영고·장흥고·사포서·양현고·오부 등 17개 관서로 증가하였다. 이후 18세기에는 사섬시·사온서·풍저창이 통폐합되어 14개 관서만 존재하였다.

관사는 한성부 중부 징청방(澄淸坊) 즉 오늘날 서울시 종로구종로1가·수송동·청진동·세종로 일대에 소재하였다. 관사에는 당상청 12칸을 비롯해 낭관청 4칸, 주학청 6칸 등이 있었다. 분호조는 남부 소공동에 위치하였다.

변천

간혹 호조의 사무가 많아지면서 낭청(郎廳) 2명을 추가로 설치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나 광해군 때는 별도의 재원 확보나 부족한 재원 충당을 목적으로 분호조(分戶曹)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에 호조 판서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직하도록 하였고, 1673년(현종 14)에는 낭관에게 훈련도감 소속의 양향청(糧餉廳) 낭청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1694년(숙종 20) 사섬시를 혁파하여 호조에 속하도록 하였고, 1710년에는 판서에게 선공감 제조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1749년(영조 25) 정랑 1명은 문신으로 뽑아 쓰도록 하였고, 1756년에는 좌랑 1명을 무신으로 뽑도록 하였다. 1767년에 사축서(司畜署)를 혁파하고 그 업무는 호조에 예속시켰다.

『탁지지』에 따르면 조선후기 호조의 업무가 확대되면서 이전의 3사를 14방으로 나누어 업무를 분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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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후기에는 호조의 담당 업무 가운데 많은 부분을 다른 관서로 옮겼다. 조세 행정에 기초 자료로 필요한 호적 관리는 한성부, 토지 이외의 잡세 중 어염세는 균역청, 군역은 병조, 대동미는 선혜청에서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고 호조에서는 전세만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수입원에 압박을 받게 되었는지 호조에서는 세원(稅源) 확보에 나섰다. 그리하여 17세기 후반 이후 진휼곡이나 군자곡에서 빌리기도 하였고 돈을 주조하여 부족한 수입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호조는 수세원(收稅源)으로 국내에서 개발된 광산에서 채취된 은과 일본에서 유입되는 은에 대한 수세를 장악하였다. 18세기에는 군사나 외교적 필요성 때문에 평안도에 비축해 두었던 재정을 호조에서 장악하기도 하였다. 호조는 1894년(고종 31) 탁지아문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탁지지(度支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재정사』, 서울특별시, 2007.
  • 한충희, 『조선초기 관아연구』, 사람, 2005.
  • 한충희, 『조선초기 육조와 통치체계』, 계명대학교출판부, 1998.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권내현, 「조선후기 호조의 평안도 재정 활용」, 『동양학』35, 2004.
  • 박소은, 「17·18세기 호조의 은 수세 정책」, 『한국사연구』121, 2003.
  • 박소은, 「17세기 후반 호조의 재정수입 확보책」, 『조선시대사학보』3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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