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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5 기준 최신판



광해군 때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한 병조(兵曹) 산하의 임시 군기 제조 관서.

개설

화기도감은 광해군 때 후금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화기(火器) 제작이 급선무라는 의견에 따라 설치되었다. 기존의 조총청(鳥銃廳)을 개칭해서 설치한 것으로 병조 소속의 임시 군기 제조 기관이었다. 화기도감은 화기 중에서도 조총과 대포 등의 총포(銃砲) 제조에 집중하였다.

조선전기에는 군기시(軍器寺)를 중심으로 군기를 제조하였다. 그러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군기 제조 체제가 권설아문(權設衙門)과 군영(軍營) 등의 다양한 기관으로 확대되었다. 그 과정에서 설치된 군기 제작 기관이 화기도감이었다. 그리고 광해군대 대외적으로 직면하였던 후금에 대한 방비라는 특수한 목적을 지니고 설치된 기관이기도 했다. 따라서 화기도감의 설치는 단순한 군기 제작 기관의 증설이 아니었다. 국제 환경 변화에 따른 군기 제작 기관의 확대라는 국가 정책의 전환 시점 선상에서 설치된 것이었다.

광해군대 조선은 명나라가 후금을 제압하는 데 실패하자 명나라의 군사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없게 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후금을 방어하기 위한 전술로 성곽을 중심으로 하는 수성(守城)을 택하였다. 수성 작전에는 화기가 필수적이었으므로 이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화기도감을 신설하게 되었다. 운영을 위한 세부 절목이 완성되기도 전에 화기도감이 먼저 설립된 것은 후금을 방어하기 위한 대책으로 화기의 증설 외에는 별다른 수단이 없었음을 시사해 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에서 화기도감과 같은 군기 제작 기관의 시초는 군기시이다. 군기시는 국가의 군기가 모두 이곳에서 나온다고 하여 무고(武庫)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기시의 기능은 피폐해졌고, 대신 신설된 군영들에 의해 군기시의 역할은 축소되어 갔다. 재정적으로도 각 도에서 바치던 공물(貢物)이 군기시가 아닌 해당 아문(衙門)으로 직접 납부되어 군기시의 예산이 삭감되어 갔다. 군기의 원료인 철과 구리, 유황의 무역도 줄어들게 되어 그 기능이 인조 후기로 오면서 완전히 축소되었다. 그 이유는 재정 지원의 중단과 특히 신설되는 군영들 때문이었다.

새롭게 증설된 군영들은 대부분 자체적으로 재정과 물력을 장만하여 군기 역시 스스로 마련하였다. 더욱이 훈련도감의 경우 도감에서 필요한 군기 외에 기존에 군기시가 담당하던 군기의 제작까지 담당해 나갔다. 따라서 조선후기 군기시의 역할은 군영에 의해 축소되었고 궁궐이나 사신 대접에 사용되는 의장용(儀狀用)과 같은 무기의 제작에 국한되어 갔다. 광해군대에 이르면 조총청, 훈련도감 등에서 생산한 화기들은 이미 각지로 나누어 보낸 상태여서 비상시를 대비하여 국가에서 보관하는 화기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외침(外侵)을 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화기도감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새로이 도입된 신무기인 조총과 화기 제조에는 많은 재원이 필요했다. 공장(工匠)·조역군(助役軍) 등의 많은 인력과 요미(料米)·가포(價布), 원료·연료 등의 엄청난 물력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화기도감은 조총청이 사용하던 예산을 화기도감으로 돌려서 사용하였다. 동시에 각처의 긴급하지 않은 일들은 전부 중지시킨 뒤 그 물력을 화기도감에 집중시켰다. 예컨대 인신(印信)은 예조(禮曹), 필묵(筆墨)은 공조(工曹), 수직군사(守直軍士)는 병조, 편철정(編鐵釘)은 선공감(繕工監)에서 지원하는 식으로 기본적인 물품까지도 다른 아문에서 각출하여 사용하였다.

조직 및 역할

화기도감의 조직은 조총청의 기구를 그대로 인수한 것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도제조(都題調) 1명, 제조 5명, 도청(都廳) 2명, 좌·우변 낭청 2명, 감조관(監造官) 1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화기의 제작은 좌변과 우변의 무낭청(武郎廳) 또는 감조관의 지도하에 각 장인들이 좌·우변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총기류는 좌·우변에 각 10개씩 있는 화로, 즉 노야(爐冶)를 중심으로 만들었다. 화포류는 좌·우변에 각 2개씩 있는, 노야보다 더 큰 화로인 대권로(大權爐)를 중심으로 작업하였다. 대권로는 길이가 3칸, 넓이가 1칸, 높이가 5척이 되는 건물을 지은 뒤 지형이 낮고 서늘한 곳에 좌대(坐臺)를 높게 쌓은 뒤 설치하였다. 화로를 이용한 화기의 제작은 계절에 따라 제한되었다. 동절기가 되어 화로의 물이 얼면 대포의 주조가 어려워 화기의 생산이 봄철로 연기되었다. 총기류 생산에 종사한 장인은 야장(冶匠), 주장(注匠), 찬혈장(窄穴匠), 조성장(照星匠), 두석장(豆錫匠), 목수, 소목장(小木匠) 등이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조총청과 군기시에서 해당 부분의 기술을 연마한 숙련장이었다.

화기도감은 임시로 설치한 권설아문이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필요 경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따라서 화기도감의 급여, 소요 경비는 서울의 각 아문들과 지방 관서에서 지원을 받아 지출하였다. 화기도감 창설 시기, 군기시에서 1년간 사용하던 정철(正鐵)의 양이 1만 근에 달했는데 이것을 화기도감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정철은 지방에서 공물로 납부하던 것으로, 직접 정철을 납부한 것은 아니었다. 정철이 생산되는 읍에서도 쌀과 포(布) 등으로 바꾸어 납부했다. 따라서 호조(戶曹)에서 쌀과 포를 거둔 다음 화기도감으로 이송하였다. 그것으로 화기도감에서는 장인의 급여와 식비를 지급하였고 필요한 동철(銅鐵)과 정철 등을 마련하였다.

화기도감에 동원된 장인들은 군기시의 군기 제작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초부터 군기시는 국가의 모든 무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그 제조 체제가 그대로 전승되었을 것이다. 군기시의 군기 제작 방법은 오늘날과 같은 분화된 작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여러 명의 장인이 각기 다른 공정을 맡아 양질의 무기를 생산하였다. 이 방법은 시간과 노동력을 절약하면서 빠른 기한 내에 많은 양의, 양질의 군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각 장인들의 공정은 일별 혹은 월별로 생산량을 파악하였다. 화기의 제조는 장인들의 생산 능력에 기초하여 생산 목표량과 생산 일정이 계획된 가운데 이루어졌다. 예컨대, 권노장(權爐匠) 1명이 하루에 생동(生銅) 450근을 제련[吹鍊]할 수 있었다. 야장 1명은 3일에 삼안총(三眼銃) 1병(柄), 2일에 소승자총(小勝字銃) 1병, 2일에 쾌창(快鎗) 1병을 제조[打造]할 수 있었다. 주장 1명은 3일에 불랑기(佛狼機) 4호(號) 1위(位), 5일에 불랑기 5호 2위, 4일에 삼안총 1병, 1일에 승자총(勝字銃) 1병을 주련(注鍊)할 수 있었다. 천혈장(穿穴匠) 1명은 1일에 쾌창(快鎗) 13병과 불랑기 13위, 현자총통(玄字銃筒) 6위, 백자총통(百字銃筒) 7위, 승자총 10병, 삼안총 10병의 구멍 뚫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조성장 1명은 1일에 승자총통 2병을 조성(照星)하고, 목수 1명은 1일에 승자총통 5병을 건조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감안한다면 화기 제작은 분업 형태에 따라 각 장인들이 부품별 생산 공정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기도감은 왕이 장인들의 작업 실태를 매월 보고받을 정도로 국가적 사업의 성격을 지녔다. 따라서 장인들을 동원하는 방법도 강제성을 띠고 시행되었다. 즉, 화기도감에 소속된 장인들은 일정한 기간 노동을 제공하고 교대로 번(番)을 서는 형태로 귀가한 후에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보조하는 조역군(助役軍)들은 모집된 자들로 장인들과 같이 매월 급료를 받으며 생산에 종사하였다.

변천

화기도감은 1623년(인조 1) 3월에 영건도감(營建都監), 나례도감(儺禮都監) 등의 12개 도감과 함께 폐지되었다. 도감을 폐지하며 그 역할을 군기시로 다시 넘겼기 때문에, 화기도감의 폐지는 군기시를 중심으로 한 군기 제조 체제의 재강화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대외 방어에 필수적인 화기의 증설을 후퇴시키는 것으로 국방 정책의 오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와 그의 정치 세력에게는 대외 문제보다 국내의 정치 안정이 더 중요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광해군이 설치한 화기도감의 폐지는 인조 정권의 안정을 위해 군권을 장악하려는 인조 정권의 계획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조대 두 차례에 걸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의 패퇴는,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으나 화기도감과 같은 외침에 대비한 군기 제작 기관을 없앴던 것도 큰 원인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인조대에도 후금에 대항하는 방어책으로 군인의 수를 확대하고 군영을 정비하며 군기 제조를 위한 군기별조청(軍器別造廳)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화기도감과 같은 전문적인 군기 제작 기관을 설치하지는 못했다.

참고문헌

  • 『화기도감의궤(火器都監儀軌)』
  • 박재광, 『화염 조선: 전통 비밀병기의 과학적 재발견』, 글항아리, 2009.
  • 유승주, 『조선시대 광업사 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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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영구, 「조선후기 화기 발달사 연구 현황과 이해의 방향」, 『학예지』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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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왕무, 「조선후기 조총 제조에 관한 연구: 17·8세기를 중심으로」, 『경기사론』2,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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