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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6일 (수) 14:32 판



대비, 왕비, 왕세자빈, 황태자비 등이 국가의 대소 의례에 참여할 때 착용하는 법복(法服).

개설

적의(翟衣)는 꿩 무늬를 넣었다는 의미로, 궁중에서 왕비와 왕세자비 등의 대례에 입는 법복이다. 적의는 규(圭) 이하 석(舃)까지의 왕비 예복의 일습을 칭하는 명칭이기도 하고, 가장 겉에 입는 상의 하나만을 지칭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명나라에서 왕이 즉위할 때 고명과 함께 보내오거나 주청에 의해 적의 일습을 받기도 하였다.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서례(序例)」에 제시된 조선후기의 왕비 예복은 규, 수식(首飾), 적의, 하피(霞帔), 상(裳), 대대(大帶), 옥대(玉帶), 패(佩), 수(綬), 폐슬(蔽膝), 말(襪), 석 등이 제시되어 있으나, 시대에 따른 변화가 있었다.

왕비의 적의 제도는 1370년(고려 공민왕 19) 5월에 명나라 태조의 효자황후(孝慈皇后)가 보내온 관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과 청색 적의, 흰색 중단(中單), 폐슬, 상, 대대, 혁대, 패, 수, 청색 버선[靑襪], 청석(靑舃) 등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명나라로부터 받은 적의는 고려말 공민왕 때 받은 적의와는 다른 제도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명나라로부터 받은 왕비 예복이 대삼(大衫)임에도 불구하고 국말까지 왕비의 예복을 적의라고 칭하였다.

1394년(태조 3) 이래 인조대까지 총 17회에 걸쳐 왕비 관복이 사여되었는데, 칠적관(七翟冠)과 대홍색 대삼, 금적계가 수놓인 청색 하피, 금적계가 수놓인 청색 배자 등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적의 제도가 국속화(國俗化)되어 갔다. 선조대 이후로는 적관 대신 체발로 수식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17세기 전기 인조 때는 배자형의 다홍색 적의에 수원적(繡圓翟) 36개를 앞뒤에 장식하였다.

또한 1713년(숙종 39)에는 홍색 적의에 봉과 같은 무늬를 장식하고 앞면에 6등의 수를 놓았으며 뒷면에 9등을 수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영조 때는 51개의 수원적을 장식한 적의 제도를 사용하였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시기에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의 황후 예복 제도와 국속 제도를 참조하여 심청색 적의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 황후는 12등 적문(翟文)의 적의를 사용하였고, 황태자비는 9등의 적의를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의 왕비의 적의 제도는 크게 다섯 차례 변화가 있었는데, 시기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는 고려 공민왕 때 명나라 초기의 제도를 수용했던 청색 적의의 시기이다. 제2단계는 조선전기 명나라에서 보내온 대홍색의 대삼제를 수용한 시기이다. 제3단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국속화되기 시작한 이후 인조와 장렬왕후(莊烈王后) 가례에서 사용된 적의 제도 시기이다. 전단후장(前短後長)의 특징을 지녔으며, 36개의 수원적을 장식한 시기이다.

제4단계는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보』「서례」에 실린 적의 제도 시기이다. 대금형의 전장후단 특징은 인조대와 같으나, 수원적의 숫자가 51개로 증가하였으며 배열 위치도 변화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제5단계는 대한제국시기의 심청색 적의 제도 시기인데, 이 시기의 적의 유물이 유일하게 두 점 남아 있다.

1370년(고려 공민왕 19) 5월에 명나라 태조의 효자황후가 보내온 왕비의 관복은 청색 적의였다. 칠휘이봉관과 청색 적의, 흰색 중단, 폐슬, 상, 대대, 혁대, 패와 수, 청색 버선, 청석으로 구성된 것이다. 관에는 칠휘(七翬)와 이봉(二鳳), 화차(花釵) 9개, 소화(小花)와 대화(大花) 장식, 박빈(博鬢) 둘, 장식판 9개[九鈿]가 있었다.

적의는 청색 바탕에 꿩을 9등으로 수를 놓았고, 흰색 사[素紗] 중단에는 홍색의 라(羅)·곡(縠)으로 가장자리를 둘렀으며, 깃에는 보(黼) 무늬를 장식하였다. 폐슬은 치마[裳]의 색상과 같으며, 검붉은 색[緅色]으로 깃과 가장자리 장식을 둘렀고, 두 줄의 꿩 무늬를 수놓았다. 대대는 적의의 색을 따랐으며, 혁대에는 금구첩(金鉤䚢) 장식이 달렸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예고(禮考)에 따르면, 조선조에 들어서는 1394년(태조 3)에 처음 면복(冕服)과 함께 왕비의 주취칠적관(朱翠七翟冠)에 하피와 금추(金墜)를 보내왔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1403년(태종 3)에도 원경왕후의 관복 1부(部)를 보내왔는데,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과 대홍색 대삼 등이었다. 관에는 결자(結子)·두양대주(頭樣大珠) 등 상대(上帶)의 각양 진주 4,260과(顆), 금사건(金事件) 1부(副) 내(內)에 유사금적(纍絲金翟) 1대(對), 금잠(金簪) 1대, 유사보전화(纍絲寶鈿花) 9개(箇), 포취사건(鋪翠事件) 내에 정운(頂雲) 1좌(座), 크고 작은 구름 장식[大小雲子] 11개, 빈운(鬢雲) 2개, 모란엽(牧丹葉) 36엽(葉), 양화빈(穰花鬢) 2개, 적미(翟尾) 7개, 구권(口圈) 1부, 화심제(花心蒂) 2부, 점취발산(點翠撥山) 1좌, 조추사 관태(皂皺紗冠胎) 1정(頂)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대홍소저사 겹 대삼[大紅素紵絲夾大衫] 1건 외에 복청소저사 겹 원령[福靑素紵絲夾圓領] 1건, 청소저사 수적계 하피[靑素紵絲綏翟雞霞帔] 1부, 그리고 무늬 새긴 금추두[鈒花金墜頭] 1개가 포함되어 있었다(『태종실록』 3년 10월 27일).

1450년(문종 1)에도 면복과 왕비 관복을 보내왔는데, 주취칠적관과 대홍저사 대삼, 복청저사(福靑紵絲) 채수권(綵繡圈) 금적계(金翟雞) 배자(褙子), 청선라(靑線羅) 채수권 금적계 하피, 삽화금추자, 상아홀(象牙笏) 등이었다[『문종실록』 즉위 8월 3일 2번째기사]. 이 제도는 고려말에 전래된 청색 적의 제도와는 다르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적의 제도를 상실하였기에 1602년(선조 35)에 『대명회전』의 친왕비, 군왕비의 관복 제도를 참고하여 왕비의 적의 제도를 정비하였다. 특히 준비가 어려운 구적관(九翟冠)은 우리나라 풍속에 따라 마련한 수식 제도를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대대 역시 갑자기 준비하기 어렵다하여 색깔에 구애받지 않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5년 7월 1일). 1623년(인조 1) 이후에도 적관을 만들 줄 아는 장인이 없어 머리카락[髢髮]으로 만든 수식을 만들어 예식을 치렀다.

1638년(인조 16) 『인조장렬후가례도감의궤(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에는 간략하지만, 유일하게 왕비 적의의 도상이 제시되어 있다. 운봉 흉배와 36개의 원적문을 장식하는 전단후단형(前長後短形) 대삼이었다. 그 후 1713년(숙종 39)에는 홍색 적의에 봉과 같은 무늬를 장식하고 앞면에 6등의 수를 놓았으며 뒷면에 9등을 수놓은 형태라고 하였는데, 금수(金繡) 오조원룡보(五爪圓龍補)를 부착하고 수원적 51개를 장식하도록 한 1751년(영조 27)의 『국조속오례의보』「서례」의 적의 제도는 숙종대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이 적의 제도는 대한제국 시기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대명회전』과 국속 제도에 근거하여 적의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대한예전』에는 황후 관복의 도설이 제시되어 있다. 알묘(謁廟) 등에 착용하는데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에 적의를 입는다고 하였다. 칠죽사(漆竹絲)의 원광모(圓匡帽)에 비취로 그 위를 장식하는데 취룡(翠龍) 9개, 금봉(金鳳) 4개를 사용하며 정 중앙에 대주를 물고 있는 용 한 마리를 장식한다.

적의는 심청색으로 만드는데 적문(翟文)을 12줄 넣어 짜며 그 사이에 소륜화(小輪花)를 넣는다. 깃과 수구, 밑단, 선단에 금운룡문을 넣은 붉은 선 장식을 두른다. 저사(紵紗)나 사(紗)·나(羅) 등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순종의 윤황후가 적의를 입고 있는 사진에는 구룡사봉관 대신 인조대 이후 적의에 사용해 온 대수(大首)라고 하는 체발로 만든 우리나라 제도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왕비 이외에도 세자빈과 대왕대비 등이 적의를 입었다. 왕세자빈의 적의는 명으로부터 사여된 바 없으며, 적의 제도가 정착되기 전에는 명복(命服)에 수식을 사용하였다. 세자빈의 적의 제도는 성종대에 수용되었다. 1627년(인조 5)의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에는 세자빈의 적관은 줄이고 대신 체발이 마련되었다.

적의는 무문아청필단(無紋鴉靑匹段)으로 하고 안감[內拱]은 남숙초를 사용하였다. 여관자수(如貫子繡)라는 것이 36개[片]가 사용되었는데, 모단(冒段) 바탕에 쌍봉을 그리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왕세자빈의 적의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색상은 흑색이라고도 한 아청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보』「서례」에 비로소 그 형태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흑단(黑緞)으로 하고 의(衣)의 앞뒤에 금사로 사조룡보(四爪龍補)를 수놓아 붙이는데 의의 제도와 수원적은 왕비복과 같다.”고 하였다.

형태

조선전기 명나라에서 보내온 대삼과 하피 형태는 2001년 중국 남창(南昌)에서 발굴된 명나라 번왕의 부인 오씨 묘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대삼은 대금형의 전장후단 특징을 지닌 긴 옷으로 옆이 트여 있으며 큰 소매가 달렸다. 뒷길 허리 부분에는 커다란 삼각형 두자(兜子)를 붙여 하피의 양 끝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하피는 5m가 넘는 길이를 끝이 모나도록 맞접은 후 끝의 모난 부분에 금추자를 달아 발끝까지 늘어뜨리고 두 자락은 어깨로 넘겨 끝이 대삼 뒤에 달린 삼각형의 두자 속으로 들어가도록 착용하였다.

1638년(인조 16) 『인조장렬후가례도감의궤』에는 적의의 도설이 제시되어 있다. 적의는 운봉흉배를 장식한 대홍필단 대삼과 아청색 무문사 배자, 화문초록사 단삼(單衫), 도홍화문사 저고리[襖], 대홍색 끈이 달린 아청색 화문 치마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외에 금적계 그림을 그린 아청색 하피와 옥대(玉帶), 수, 패옥, 초록과 대홍필단으로 만든 대대, 청옥규, 적석, 적말이 함께 마련되었다.

특히 대삼의 도상은 이때 처음 제시되었는데 앞이 짧고 뒤가 긴 형태이며 원형의 금적문을 36개 장식한다고 하였다. 그림 상으로는 양 어깨에 5개씩, 좌우 앞길의 옆선에 5개씩, 모두 20개가 묘사되어 있다. 16개는 뒷면에 장식되었으나 배치는 확실하지 않다.

1751년(영조 27)의 『국조속오례의보』「서례」의 기록에 인조대와는 다른 적의제도가 제시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숙종대의 제도인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데 규는 백옥으로 하는데 전하의 규와 같다고 하였으며, 수식은 『주례(周禮)』의 편(編)과 대략 같게 하는데 금장식[金粧]을 더한다고 하였다.

한편 적의는 대홍단으로 앞면 좌우가 서로 마주하여 곧게 내려가서 배자처럼 서로 덮이지 않도록 만드는데, 앞은 치마의 길이와 같고 뒤는 한 자 길게 한다. 금수 오조원룡보를 장식하고 보 아래에 수원적을 붙인다. 왼쪽에 7개, 오른쪽에 7개를 다는데 밑단에 좌우 1개씩을 달아 이어진 것처럼 한다. 뒷면의 보 아래로 좌우에 9개씩을 달고 밑단 중간에 1개를 붙여 좌우가 연결된 것처럼 한다. 좌우 소매 넓이는 앞 길이에 이르도록 하고 좌우 소매 끝 바깥쪽으로 수원적을 9개씩 달아서 모두 51개를 장식한다고 하였다.

하피는 흑단으로 만드는데 안감에 홍초를 사용하고 금으로 운하적문(雲霞翟文)을 그렸는데 운하는 28개, 적문은 26개를 그렸다. 상은 청단(靑緞)으로 만드는데 전삼폭(前三幅)은 짧고 연결한 후사폭(後四幅)은 길다. 각 2폭을 연봉하여 서로 겹치도록 한다. 앞뒤 모두 주름[辟積]을 잡았으며 중간 아래에 직금룡(織金龍) 스란(膝蘭) 조각을 붙인다.

대대는 대홍단(大紅緞)으로 만드는데 안감은 백릉(白綾)으로 하고 녹색 비단[綠緞]으로 가장자리를 두른다. 옥대는 금으로 봉(鳳)을 그린 청단으로 싸서 조각한 옥[雕玉]으로 장식한다. 패와 수, 폐슬, 버선과 석은 전하의 것과 같다. 단 왕비의 신발 끝에는 홍색과 녹색 실[紅綠絲]로 만든 꽃 3개를 장식하였다.

용도

적의의 용도는 매우 다양하였다. 왕비는 적의와 수식을 국혼이나 조하의 등의 가례와 다양한 진연·진찬 등에 착용하였으며, 종묘 행례 등의 길례 때와 흉례에서는 대렴 의대로 사용하였다. 동조(東朝)나 혜경궁 등은 존호를 받을 때, 또는 그 후의 일련의 축하 행사 등에서 적의를 각각 착용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
  • 『대한예전(大韓禮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영숙, 『조선조후기 궁중복식』, 신유, 2002.
  • 문화재청 무형문화재과,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2, 문화재청, 2006.
  • 박성실, 「숙종·인현왕후의 가례복식」, 『조선조 숙종인현후 가례의 연구』, 2004.
  • 김연자, 「조선왕주 왕세자빈 적의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 이재선, 「조선왕조 왕비 적의에 관한 연구와 복원제작」,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중국직수복식전집 편집위원회 편, 『중국직수복식전집』권3, 천진 인민미술출판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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