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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거산도에 속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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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삼례도에 속한 역.
  
 
=='''개설'''==
 
=='''개설'''==
  
거산역(居山驛)은 4군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설치된 [[거산도(居山道)]]의 속역으로, 함경도 북청에 위치하였다. 세조대에 역제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면서, [[찰방(察訪)]]을 파견해 역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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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산역(居山驛)은 고려 성종대에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역제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면서 삼례도(蔘禮道)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전라도 태인에 위치하였으며,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할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설립 경위 및 목적'''==
  
거산역이 설치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432년(세종 14)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즉 세종 연간에 4군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설치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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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참역 조에 따르면, 거산역은 고려시대부터 전라도 태인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설치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전공주도에 소속된 21개 속역 중 하나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반석역(半石驛)]]·조원역(烏原驛)·갈담역(葛覃驛)·소안역(蘇安驛)·촌곡역(材谷驛) 등과 함께 삼례도에 소속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직 및 역할'''==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거산역은 북청도호부 동쪽 6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1757년(영조 33)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관아에서 동쪽으로 51리 떨어진 거산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여지도서』에 따르면, 거산역에는 상등마 3필, 중등마 7필, 하등마가 13필 등 총 23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310명, 역노(驛奴) 280명, 역비(驛婢) 13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1895년(고종 32)에 편찬된 『관북역지(關北驛誌)』를 살펴보면, 수리(首吏) 1명, 유리(由吏) 1명, 장무집리(掌務執吏) 1명, 유심리(留番吏) 1명, 예리(禮吏) 1명, 병리(兵吏) 1명, 형리(刑吏) 2명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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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고종 9)에 편찬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 따르면, 거산역에는 [[역리(驛吏)]] 11명, 역노(驛奴) 3명, 역비(驛婢) 2명, [[역보(驛保)]] 52명, 솔정(率丁) 26명, [[일수(日守)]] 3명, 번인(番人) 1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역마의 경우 1872년의 『호남읍지』에는 마필(馬匹)과 마호(馬戶)가 각각 11필과 11호로 기록되어 있으며, 1895년(고종 32)의 『호남읍지』에는 9필과 9호로 나타나 있다. 마호 1호당 1필의 역마를 사육한 것으로 보인다.
  
 
=='''변천'''==
 
=='''변천'''==
  
1401년(태종 1)에 개편되기 시작한 조선시대의 역제는 세종과 세조대를 거쳐 완성되었다. 세종대에는 4군 6진의 설치를 계기로 북방 개척에 주력하였고, 그에 따라 역참의 신설 지역도 확대되었다. 이후 세조대에는 1457년(세조 3), 1460년(세조 6), 1462년(세조 8) 세 차례에 걸쳐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는 역제 개편 과정에서 여러 도와 역의 [[역승(驛丞)]]을 없애고 찰방으로 하여금 여러 도를 아울러 관리하게 하면서 발생한 각종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함경도에는 거산도·고산도·수성도 등의 역도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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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거산역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은, 1415년(태종 15)에 관찰사[[박습(朴習)]]의 [[계문(啓聞)]]따라 태인현의 치소를 거산역으로 옮겼다는 기사를 통해서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508010_005 『태종실록』 15년 8월 10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거산역은 앵곡도(鶯谷道)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1462년(세조 8)에 전라도의 역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앵곡도가 삼례도에 통합되면서 삼례도의 13개 속역 중 하나로 편제되었다.
 
 
거산역은 세종대에는 동기도(東歧道)속역으로 편성되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거산도의 속역에 거산역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도총사(都摠使)이준(李浚)과 여러 장수들이 거산역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통해, 세조대에도 거산역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선조실록』에서 거산역은 남도·북도의 교차 지점에 위치해 있으므로 변경(邊警)이 많은 때일수록 조발(調發)과 전보(傳報)에 대한 일이 어느 역에 비해 더욱 긴요하다고 언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901004_003 『선조실록』 39년 1월 4일]). 이로 볼 때 거산역은 조선시대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으로 인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선조실록』에서는 거산역을 인구와 물산이 꽤 많은 편이고 어채(漁採)의 이익이 매우 풍요한 곳으로 묘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912003_002 『선조실록』 39년 12월 3일]).
 
  
 
=='''참고문헌'''==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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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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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읍지(湖南邑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관북역지(關北驛誌)』       
 
 
*조병로, 『韓國近世 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       
 
*조병로, 『韓國近世 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       
 
*정요근, 「高麗前期 驛制의 整備와 22驛道」, 『한국사론』45, 2001.       
 
*정요근, 「高麗前期 驛制의 整備와 22驛道」, 『한국사론』45, 2001.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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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41 판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삼례도에 속한 역.

개설

거산역(居山驛)은 고려 성종대에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세조 연간에 역제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면서 삼례도(蔘禮道)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전라도 태인에 위치하였으며,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관할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 조에 따르면, 거산역은 고려시대부터 전라도 태인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설치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전공주도에 소속된 21개 속역 중 하나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반석역(半石驛)·조원역(烏原驛)·갈담역(葛覃驛)·소안역(蘇安驛)·촌곡역(材谷驛) 등과 함께 삼례도에 소속되었다.

조직 및 역할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 따르면, 거산역에는 역리(驛吏) 11명, 역노(驛奴) 3명, 역비(驛婢) 2명, 역보(驛保) 52명, 솔정(率丁) 26명, 일수(日守) 3명, 번인(番人) 1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역마의 경우 1872년의 『호남읍지』에는 마필(馬匹)과 마호(馬戶)가 각각 11필과 11호로 기록되어 있으며, 1895년(고종 32)의 『호남읍지』에는 9필과 9호로 나타나 있다. 마호 1호당 1필의 역마를 사육한 것으로 보인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거산역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은, 1415년(태종 15)에 관찰사박습(朴習)계문(啓聞)에 따라 태인현의 치소를 거산역으로 옮겼다는 기사를 통해서이다(『태종실록』 15년 8월 10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거산역은 앵곡도(鶯谷道)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1462년(세조 8)에 전라도의 역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앵곡도가 삼례도에 통합되면서 삼례도의 13개 속역 중 하나로 편제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호남읍지(湖南邑誌)』
  • 조병로, 『韓國近世 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
  • 정요근, 「高麗前期 驛制의 整備와 22驛道」, 『한국사론』45,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