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역(半石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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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삼례도에 속한 역.

개설

고려시대에 반석역은 산남도(山南道)에 소속된 28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전주목(全州牧)에 위치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반석역(半石驛)은 삼례도(參禮道)에 소속돼 역승(驛丞)의 지휘를 받았다. 그 뒤 세조 연간인 1462년에는 전라좌도의 역도(驛道)인 삼례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역제(驛制)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산남도에 소속되었다. 여기에는 역명이 반석역(盤石驛)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에 비해 조선 세종대의 역로 개편 결과가 반영된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조에는 반석역(半石驛)으로 표기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명칭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개칭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전라도 완산지 편에 따르면, 당시 반석역에는 역리(驛吏) 15명, 번인(番人) 21명, 보인(保人) 64명, 역노(驛奴) 4명, 역비(驛婢) 3명과 역마 15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또한 역의 재정에 충당하도록 하기 위해 위전답(位田畓) 41석과 복호(復戶) 66결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한편 1872년(고종 9)에 작성된 『호남읍지(湖南邑誌)』「삼례도역지」에는 당시 반석역에 역리 15명, 역노 4명, 역비 3명, 역보(驛保) 64명, 솔정(率丁) 32명, 일수(日守) 81명, 번인 21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건국 직후부터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기존의 역로를 개편하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에 따르면 반석역은 전라도 지역의 역도인 삼례도에 소속되었다. 그 뒤 1457년(세조 3)의 역승 폐지 조치로 찰방의 순시 범위가 넓어지면서 각 역도에 소속된 역의 수가 많고 역 사이의 거리가 멀어 역로가 쇠퇴하는 등 각종 폐단이 발생하자, 1462년(세조 8)에 대대적으로 역로가 개편되었다. 그 결과 반석역은 전라좌도의 역도인 삼례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성종대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확립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도 변함없이 삼례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여지도서』 전라도 완산지 편에 따르면, 반석역은 전주부 남쪽 2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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