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葡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1:1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포도 |
한글표제 | 포도 |
한자표제 | 葡萄 |
관련어 | 건포도(乾葡萄), 마유포도(馬乳葡萄), 머루[山葡萄], 수정포도(水精葡萄), 청포도(靑葡萄)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식재료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차경희 |
수확시기 | 7~9월 |
관련 의례 | 천신제(薦新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포도(葡萄)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2년 8월 27일, 『연산군일기』 5년 9월 1일, 『연산군일기』 11년 6월 27일, 『성종실록』 23년 8월 12일, 『연산군일기』 6년 10월 14일, 『순조실록부록』 9년 2월 2일, 『순조실록부록』 9년 2월 21일, 『태조실록』 7년 9월 1일, 『태조실록』 7년 9월 3일, 『성종실록』 6년 8월 2일 |
천신제(薦新祭)를 지낼 때 올리던 제물의 하나로, 생과·정과나 술로 가공하여 먹던 포도(葡萄)나무의 열매.
개설
포도나무의 열매로 시고 단 향미가 있고, 과즙이 풍부한 장과류(漿果類)이다. 과실이 성숙함에 따라 산 성분은 감소하고 당분이 증가하여 단맛이 높아진다. 종묘에 천신하는 물품으로 청포도(靑葡萄)는 7월, 머루[山葡萄]는 9월에 올렸으며, 건포도를 쓰기도 하였다.
원산지 및 유통
원산지는 서아시아의 흑해 연안과 캅카스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이미 재배가 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목은집(牧隱集)』에도 포도와 포도주에 대한 기록이 10여 차례 등장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강원도에는 포도가, 충청도에는 건포도가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 다양한 포도의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호수(徐浩修)는 청나라를 방문하고 쓴 『연행기(燕行紀)』에서 포도는 서역(西域)에서 왔다. 근래에 합밀(哈密), 회자(回子) 등의 지방에서 산출되는 각종 종자를 얻어서 금원(禁苑)에 심었더니 그 열매가 흰 것, 푸른 것, 자색(紫色)인 것이 있다. 모양이 말의 젖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마유포도(馬乳葡萄)라고 한다. 한 송이 안에도 알이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는데, 송이 전체의 알이 작은 것은 쇄쇄포도(瑣瑣葡萄)라고 한다. 품종은 비록 다르나 맛은 모두 달고 좋다. 성질은 북방(北方)의 사석수토(沙石水土)에 맞는다. 이것을 남방(南方)에 옮겨 심으면 본래의 맛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순조대에 연경을 다녀온 연행기록인 『계산기정(薊山紀程)』에는 황제가 하사한 세찬(歲饌) 과일 중에 건포도·생포도(生葡萄)·백포도(白葡萄)가 있었는데, 백포도는 회회국(回回國)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하였다. 생과는 모두 제때가 아닌데도 새로 막 딴 것과 같다고 하였다. 『부연일기(赴燕日記)』에는 과일로 건포도와 생포도가 있다.
『상촌집(象村集)』에서 신흠(申欽)은 동양위(東陽尉)가 그린 포도 4송이를 보며, “줄기며 잎이며 매달린 열매가 참으로 요양에서 생산된 것과 같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요양관(遼陽館)에 머물 때 요양 사람 중에 서로 알고 지내는 자가 날마다 나에게 마유포도를 주었다. 매양 밥을 먹고 나서 먹으니 매우 좋았다. 모양과 맛이 특이하여 입에서 상쾌한 기가 감도는 것을 느끼곤 하였는데, 한도(漢都)의 인가에서 심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연행일기(燕行日記)』에는 중국의 포도는 우리나라의 자포도(紫葡萄)와 같은데 맛이 그보다 훨씬 좋았다고 하였다. 동지정사(冬至正使)박종악(朴宗岳), 부사(副使)서용보(徐龍輔)가 연경에서 출발할 때 황제가 어선방(御饍房) 관원을 시켜 한 사람 당 포도 1대를 전해 주게 하였는데, 씨가 없고 작으며 맛이 매우 달았다고 하였다.
선조와 제독(提督)이승훈(李承勛)이 일본의 사신 문제와 중국 군대를 위한 군량 조달 문제를 환담하는 자리에 이승훈이 마련한 주과(酒果)에 용안(龍眼)·여지(荔枝)·황등(黃橙)·녹귤(綠橘)·금포도(金葡萄) 등이 있었다(『선조실록』 32년 8월 27일), 『부상록(扶桑錄)』에는 일본에서 과일상을 바쳤는데 마유포도는 종자가 중국에서 온 것으로 맛이 매우 달고 윤택하며, 밤은 크기가 주먹만 하고, 배는 연하기가 물과 같으며, 반쯤 말린 감은 맛이 아주 좋다고 하였다.
연산군대에는 상강(霜降) 후 서리 맞은 포도를 진상하게 하였으며(『연산군일기』 5년 9월 1일), 마유포도·수정포도(水精葡萄)도 민가에서 구해 봉진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6월 27일). 진상된 머루와 건포도에 대한 기록은 『만기요람(萬機要覽)』에도 있다. 포도는 정과로 만들어서 진상되었다.
포도가 진상되면 성종은 승정원(承政院)·홍문관(弘文館)·병조(兵曹)·도총부(都摠府)에 내려주고, 이어 문관(文官)에게 명하여 내려준 술과 포도에 대하여 근체시(近體詩)를 지어서 바치게 하였다(『성종실록』 23년 8월 12일). 연산군도 마유포도를 승정원에 내려서 맛을 보고 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6년 10월 14일).
포도는 생과로 가장 많이 소비되었으나, 말리거나 술로 가공하여 유통되기도 하였다. 『담헌서(湛軒書)』에는 항주(杭州)에서 가지고 온 귤병(橘餠), 용안, 건포도 등의 과실은 향기롭기가 북경에서 만든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일사집략(日槎集略)』에 건포도가 나왔는데, 빛은 자색이요, 맛은 달며, 크기는 당포도(唐葡萄) 마른 것보다 조금 큰데, 이는 서양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1594년(선조 27)에 중국 군대의 파병과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러 중국에 갔을 때의 시를 모은 『간이집(簡易集)』「갑오행록(甲午行錄)」에는 태좌(台座)가 꿀에 담근 포도를 나눠 보내 주었기에 첩운(疊韻)하여 사례한 시에 포도주의 맛이 묘사되어 있다. 또 서거정(徐居正)은 『사가집(四佳集)』에서 포도와 포도주를 노래했다.
『연행기사(燕行記事)』 「문견잡기(聞見雜記)」에서는 서양의 포도주를 일본의 술 빚는 모습과 대비하여 묘사하였다. 왜인(倭人)의 술은 소나무 통에 빚어서 땅속에 묻었다가 3년 뒤에 꺼내기 때문에 맛이 매우 순하고 솔 냄새가 나며, 불같이 찌는 데에 두어도 향기롭고 맑은 것이 감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양의 소위 포도주(葡萄酒)는 빛이 맑고 푸르며 맛이 왜주(倭酒)와 같은데 아름답다고 하였다. 중국의 연경 주점에서는 청포도주(靑葡萄酒)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술을 팔았다고 한다.
대한제국 시절에 순조는 총독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생일에 적포도주와 브랜디를 주었고(『순조실록부록』 9년 2월 2일), 제9사단장 가와무라 소고로에게도 적포도주를 하사하였다(『순조실록부록』 9년 2월 21일). 포도주가 상당히 애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원 및 용도
포도는 주로 생과로 이용되며, 조선시대에는 정과·건과·음료·양조 등으로 이용되었다. 『주방(酒方)』에는 포도정과법으로 포도가 막 익어 무르지 않을 때 따서 찌꺼기를 추려 내어 꿀과 한데 재웠다가 쓴다고 하였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포도차 만드는 법이 나와 있다. 포도와 문배를 즙을 내고, 생강즙에 꿀을 섞는다. 맹물을 끓인 백비탕을 차게 식혀 3가지 즙을 섞으면 그 맛이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온주법(蘊酒法)』에는 잘 익은 포도즙을 걸러 이화국(梨花麴)에 섞어 맛이 좋은 포도주를 빚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도 『증류본초(證類本草)』를 인용하여 포도 익은 것을 손으로 비벼 그 즙을 짜서 찹쌀지에밥과 흰 누룩을 섞어 빚으면 저절로 술이 되고 맛 또한 훌륭하다는 기록이 있다. 머루로도 된다고 하였다.
병환 중의 왕들은 포도를 먹고 기력을 회복하였다. 태조가 병중에 있을 때 수정포도를 먹고자 하니 세자와 여러 왕자가 개성의 유후사(留後司)와 기내 좌도(畿內左道)에 널리 구하여 서리를 맞아 반쯤 익은 산포도를 구하였고(『태조실록』 7년 9월 1일), 이틀 후에는 수정포도를 구해 와서 바치므로 왕이 목이 마를 때마다 1~2개씩 맛을 보고, 병을 회복하였다(『태조실록』 7년 9월 3일). 86세로 죽은 행부사직(行副司直)정척(鄭陟)의 졸기에, 세종이 병환이 난 지 오래되어 포도를 맛보려고 했으나 절후가 늦어서 진상할 수가 없자 정척이 자신의 집 정원에 있던 수정포도를 따서 올렸더니 답답하던 가슴이 포도를 먹고 상쾌하게 되었다고 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성종실록』 6년 8월 2일).
생활민속 관련사항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7(盎葉記七)」에는 화가에게 필요한 그림물감으로 포도갈색(葡萄褐色)을 분에다 삼록과 자화를 넣어 조제한다고 하였다.
『산림경제』 「종수(種樹)」편에는 포도나무의 꺾꽂이를 하는 법과 영희전(永禧殿) 재실 뜰에 있는 마유포도 나무의 예를 들어 추운 겨울을 나는 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치선(治膳)」편에는 포도를 비롯한 청과 수장법이 기록되어 있다. 『규합총서』와 『보감록(寶鑑錄)』에는 포도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한 방법으로 꿀에 담거나 납설수(臘雪水)에 담그면 봄까지 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간이집(簡易集)』
- 『계곡집(谿谷集)』
- 『계산기정(薊山紀程)』
- 『규합총서(閨閤叢書)』
- 『담헌서(湛軒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목은집(牧隱集)』
-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 『보감록(寶鑑錄)』
- 『부상록(扶桑錄)』
- 『부연일기(赴燕日記)』
- 『사가집(四佳集)』
- 『산림경제(山林經濟)』
- 『상촌집(象村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행기(燕行紀)』
- 『연행기사(燕行記事)』
- 『연행일기(燕行日記)』
- 『온주법(蘊酒法)』
- 『일사집략(日槎集略)』
- 『주방(酒方)』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동역사(海東繹史)』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