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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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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철장 |
한글표제 | 철장 |
한자표제 | 鐵匠 |
상위어 | 공장(工匠), 장공인(匠工人), 장인(匠人) |
하위어 | 취련군(吹鍊軍) |
동의어 | 철공(鐵工) |
관련어 | 수철장(水鐵匠), 야장(冶匠), 유철장(鍮鐵匠), 주철장(鑄鐵匠)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조선 |
왕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장경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철장(鐵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6년 7월 14일 |
철광석(鐵鑛石)이나 사철(沙鐵) 산지에서 철의 원료를 채굴하고 제련하는 장인.
개설
조선시대에 철장(鐵匠)은 철공(鐵工)이며, 철광석이나 사철 등의 산출지에서 철의 원료를 채굴하거나 제련을 담당하는 장인이다. 이러한 기능은 주철장(鑄鐵匠)도 일부 가지고 있으며, 철주장(鐵鑄匠)·수철장(水鐵匠)·연장(鍊匠)·연철장(鉛鐵匠)·정철장(正鐵匠)·유철장(鍮鐵匠)·쇠쟁이·승냥쟁이·승냥바치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인간이 철기를 다루면서 철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장인이 등장하였으며, 이것이 제도화된 시기는 고려시대에 철소(鐵所)에 철장을 두고 상당히 전문화된 생산 활동을 하면서부터이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 국가의 장인 제도를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체계화하고, 이들을 제작 공정별로 전문화시켜 다양한 명칭으로 종목을 세분화시켰다. 그리하여 무쇠로 제품을 만드는 수철장, 동철로 그릇을 만드는 유철장, 연장을 만드는 정철장, 주물을 떠내는 주철장 등 다양한 장색을 법적으로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철장은 경공장이나 외공장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관장제하의 장인들이 철을 원료로 완성된 기물을 만드는 장인이기 때문이다.
담당 직무
철장은 철장(鐵場)이나 철장도회소(鐵場都會所)에서 사철(砂鐵)이나 철광석을 채취한 후 이것을 제련하여 원료인 철을 얻는 신역(身役)을 졌다.
첫째, 사철광에서 사철을 채취하는 것이다. 세종대에 석철광 산지는 15개 읍, 사철광 산지는 21개 읍이었는데, 이 중 채굴이 용이한 사철광에서 작업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철장에 의하면 봄·가을의 농한기에 농민들로 하여금 각각 20~30일간 취련(吹鍊)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이때 각지의 수군[吹鍊軍·炊鍊軍]을 동원하였는데, 1444년(세종 26)의 경우, 하루에 한 사람이 6두 가량을 채취하였다(『세종실록』 26년 7월 14일).
둘째, 석철광에서 채취한 철광을 가마에서 제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철광석을 돌절구에 넣고 절굿공이로 5~10㎝ 정도의 일정한 크기로 깬다. 다만 광석이 분말 상태로 입자가 너무 작으면 밀도가 커져 가마 내부를 막아 온도 조절이 어렵고 녹은 철 덩어리가 바닥에 응고되어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때문에 이 작업에서는 가마를 만들고 그것의 온도 유지와 연료 소모를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송풍이다. 송풍 장치로는 소·말·양 등의 가죽으로 만들어 바람을 넣는 가죽 주머니와 나무 상자 형태로 만든 풀무가 있다.
변천
조선전기에 철의 생산과 수급은 철 생산지에 설치된 철장에 소속된 철장들이 담당했지만, 철 생산이 점차 민영화되어 사영 제철소와 장인들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철 생산 장인의 변화는 철 생산 수공업에 따라 시기별로 변화하였다.
15세기 전반기에 조선 정부는 새로 수도를 건설하거나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철의 생산을 강구하였다. 이들의 주무 관서는 선공감과 군기감이었지만 이곳은 철제품을 제작하는 기관이었고,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철은 농민 스스로 철을 생산하거나 구입하여 바치도록 하는 염철법(鹽鐵法)으로 조달되었다. 한편 지방의 각 영·진과 계수관에서 소요되는 철은 19개 읍에 민영 야철장(野鐵場)을 설치하고, 이곳에 정부가 재력과 인력을 동원하여 파견한 철장관이 2백여 명의 취련군(吹鍊軍)을 모아 매일 필요량을 생산하는 철장제(鐵場制)를 통해 조달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정부의 재정적 부담과 농민에게 끼치는 폐해가 컸다. 이에 15세기 후반에는 이들 제도가 폐지되고, 철장도회읍과 인근 읍의 농민들을 춘추 농한기에만 동원해 철을 채취하여 바치는 철장도회제(鐵場都會制)가 채택되었다. 철장도회의 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동되었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것은 경기·강원도를 제외한 27개 소가 있었다. 이러한 철장도회는 대부분 석철보다는 사철 산지읍에 설치되었으며, 농민들은 강의 모래에서 철을 채취하였다.
조선중기에 철물에 대한 수취 체제가 변질되는 상황에서 16세기 말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 등 5군문(軍門)에서는 산철지(産鐵地)를 절수하거나 철을 제련하는 철장이나 철물을 생산하는 각색 장인을 군대에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1594년(선조 27)에 재령의 철현둔, 1659년(현종 즉위)에 장연의 왕제둔 등, 17세기 말까지 68개 소의 연광(鉛鑛)을 개발하게 되었다. 당시 장인들은 취철병(吹鐵兵)으로 편입되어 신철(薪鐵)을 상납하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번창했던 군영문의 군수 광산도 무기 제조업과 함께 17세기 말 이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후반기에는 공인(貢人)들에 의한 관청 선대제(先貸制)적인 민영 수공업이 발달했듯이, 광업에서는 1651년의 호조별장제(戶曹別將制)로부터 설점수세법(設店收稅法)으로 전개되었다.
호조별장제의 은광업도 18세기 중엽부터는 쇠퇴하기 시작하여, 1702년에 60∼70개 소에 달했던 은점이 점차 줄어들어 1775년에는 23개 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에 호조는 같은 해에 별장제를 혁파하고 수령수세제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상업 자본가인 상인 물주가 호조에게 설점 허가를 받아 자기 자본으로 점소를 설치 운영하고, 당해 지역의 수령에게 호조가 정한 세금을 수납하는 제도였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기에는 이러한 물주제하의 광업 경영 형태가 금·은광 및 동광에 적용되었고, 특히 사금광은 전국 각지의 하천에서 개발되었다. 이처럼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기에는 물주가 자본을 투자하고 광주나 덕대가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여 분업과 협력하에 광산을 운영하는 자본주의 경영 형태가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유승주, 『조선시대 광업사 연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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