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지사(僉知事)"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0:5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첨지사 |
한글표제 | 첨지사 |
한자표제 | 僉知事 |
상위어 | 당상관(堂上官), 동지사(同知事), 산직(散職), 예우직(禮遇職) |
동의어 | 첨지원사(僉知院事) |
관련어 |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 부지사(副知事), 사역원(司譯院), 승문원(承文院), 중추부(中樞府), 통례문(通禮門)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근호 |
관품 | 정삼품 당상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첨지사(僉知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연산군일기』 12년 1월 6일 |
중추부(中樞府)에 소속된 정3품 당상관의 관직.
개설
조선초 첨지사(僉知事)는 승문원을 비롯해 통례문·사역원·중추원 등에 소속되었으며, 각각의 설치 시기는 달랐다. 승문원의 경우 1408년(태종 8) 12월에 전신인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에 종3품의 품계로 1명이 설치되었다가, 1410년 문서응봉사가 승문원으로 개편된 뒤에는 종4품으로 격하되어 2명의 정원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1433년(세종 15)에 첨지사는 다시 부지사(副知事)로 개칭되었다.
1414년(태종 14)에는 대대적인 관제 개편이 있었는데, 이때 통례문의 인진사(引進使)를 첨지사로, 사역원의 부사(副使)를 첨지사로 개칭하였다. 1432년에는 삼군부를 중추원으로 개칭하면서 첨지사를 두었다. 관서 내 관원들이 모일 때 정2품은 동쪽에, 종2품은 서쪽에, 첨지사는 남쪽 줄에 차례로 앉게 하였다.
1466년(세조 12) 중추원을 중추부로 개편하면서 첨지원사(僉知院事)를 첨지사로 개칭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경국대전』에 반영되어 정3품 당상관에 정원 8명으로 소속되었으며, 나머지 관서의 경우에는 혁파되었다.
조선전기에는 귀화한 여진족에게 첨지사를 제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담당 직무
중추부는 문·무 당상관의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이므로, 실제적인 직무는 없었다. 다만, 1432년 중추원이었을 당시 숙직하면서 궁을 지키던 숙위(宿衛)·경비 등의 일을 하였다. 이때 첨지사 이상으로 1명은 입직하고, 1명은 순찰하게 하여 돌아가며 교대하게 하였다. 또한 지사·동지사와 함께 궁을 순찰하던 순장(巡將)을 겸하기도 하였다.
변천
1506년(연산군 12) 1월 경상좌·우도, 전라도, 충공도(忠公道)의 병마절도사는 동지중추부사가 겸하게 하는 대신 수군절도사는 첨지중추부사가 겸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1월 6일). 『속대전』에서는 정원 8명 가운데 3명이 위장(衛將)의 체아직으로 설정되었다. 『대전통편』에서는 중인과 서얼을 중추부 관직에 제수할 때 동지중추부사와 첨지중추부사를 넘을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1900년(광무 4) 귀족원(貴族院)을 돈녕원으로 개칭하면서, 첨지사가 갑오개혁 때 개편된 3~6품의 관계(官階)인 주임관(奏任官)급으로 설치되었고, 정원은 1명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