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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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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령 |
한글표제 | 령 |
한자표제 | 令 |
상위어 | 부정(副正), 수(守), 정(正), 첨정(僉正) |
하위어 | 봉사(奉事), 부봉사(副奉事), 주부(主簿), 직장(直長), 참봉(參奉) |
관련어 | 고(庫), 능(陵), 서(署), 참상관(參上官), 창(倉)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조 ~ 고종 |
집필자 | 한충희 |
관품 | 종오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령(令) |
조선시대 종친부와 소격서(昭格署)·종묘서·사직서(社稷署)·평시서(平市署)·사온서(司醞署)·의영고(義盈庫)·장흥고(長興庫)·오부(五部) 등의 장관과 조경묘·경기전과 건원릉 등 여러 전(殿)·능(陵)의 관리를 책임진 정·종5품 관직.
개설
령(令)은 조선 개국과 더불어 여러 관서에 설치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운영되었다. 조선전기에는 대부분 소격서·종묘서 등의 서(署)와 의영고·장흥고 등의 고(庫)에 장관직으로 설치되어 해당 관서의 정사를 총관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서와 고의 령은 거의 혁거된 반면, 종5품 아문으로 승격된 오부에 각 1명씩, 40여 개의 궁(宮)·묘(廟)·전·능·원(園)에 각각 1~3명이 설치되었다. 한편 세종 연간 이후에는 종친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종친부에도 정5품직으로 편제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존속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령의 대부분이 역대 왕과 왕후의 능실(陵室) 및 선대왕의 초상화인 진영(眞影)을 관리하는 능과 전 등에 설치되었다. 대부분이 능에 설치되었으므로, 능의 령이 령을 대표하는 관직이 되었다.
담당 직무
정무(政務)를 담당한 관서인 여러 서와 고, 오부 등의 령은 장관으로서 주부(主簿)나 직장(直長) 이하의 관원을 지휘하면서 해당 관서의 정사를 총관하였고, 경기전·선원전·영희전 등의 여러 전과 건원릉 등의 능, 현륭원·휘경원 등의 원에 속한 령은 단독으로 또는 여타 령과 함께 참봉을 지휘하면서 궁·묘·전·능·원의 관리를 맡아보았다.
변천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관제를 정할 때 고려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경시서(京市署)·사온서·사선서(司膳署)에 종5품 령 각 1명, 의영고·장흥고·요물고(料物庫)·제용고(濟用庫)·해전고(解典庫)와 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에 종5품 사(使) 각 1명을 둔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이때 공조서(供造署)와 개성부(開城府)의 오부에 종6품 령 각 1명, 전옥서(典獄署)·전구서(典廐署)에 각 2명, 서적원(書籍院)에 종7품 령 1명, 도염서(都染署)에 정8품 령 2명이 각각 설치되었다. 이어서 1403년(태종 3)에는 고려 태조를 비롯한 네 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崇義殿)에 종3품 사 이하의 관직을 둘 때 종5품 령이 설치되었고, 다시 1443년(세종 25) 12월에는 종친의 관계(官階)와 종친에게 제수하는 경(卿) 이하의 관직을 정하는 과정에서 종친부(宗親府)에 정5품 령이 무정수(無定數)로 설치되었다. 종친부의 령이 다른 관서의 장관보다 높은 품계인 정5품으로 규정된 것은 종친부를 우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1466년(세조 12)까지 관제 정비에 따른 관서의 신치(新置)·혁파·승격과 육조(六曹) 속아문(屬衙門)의 정3품 이하 관직의 관직명 통일 등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소격전이 승격된 소격서, 사직단이 승격된 사직서, 경시서가 개칭 및 승격된 평시서, 의영고·장흥고 등의 사가 령으로 개칭되었다. 그뿐 아니라 풍저창·광흥창의 사가 정4품 수(守)로 승격·개칭되었으며, 사선서의 령 등이 혁파되거나 개칭되었다. 그 결과 소격서·종묘서·사직서·평시서·사온서와 의영고·장흥고 및 숭의전에 각 1명씩으로 정착되었다가 그대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이후 한성부 오부가 종5품 아문으로 승격되고, 소격서·사온서가 혁거되었으며, 의영고·장흥고가 종6품 아문으로 강등되었다. 또 정4품 아문이던 광흥창이 종5품 아문으로 강등되었고, 종묘서와 사직서의 영은 정원이 각 1명씩 늘어났다. 그에 따라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는, 무정수의 종친부와 종묘서·사직서에 각 2명, 오부·광흥창·평시서·숭의전 등에 각 1명을 두도록 조정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에는 선왕·선후의 능·전 등의 관리를 위하여 그와 관련된 령·직장·참봉을 대대적으로 두었는데, 그에 따라 1865년(고종 2)까지 다음과 같이 1궁·1묘·7전·29릉·2원에 령이 각각 1~3명 배치되었다. 단, 화령전(華寧殿)의 령은 수원유수부 판관이 겸임하였다.
이 관제가 1894년(고종 31)까지 계승되었고, 이후 갑오개혁 과정에서 관제를 근대식으로 개편할 때 정무를 맡은 관서와 여러 능의 령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궁내부(宮內府)에 소속된 종묘서·사직서·영희전(永禧殿) 등의 령은 참봉(參奉)과 더불어 판임관(判任官)으로 존속하다가 1907년(융희 1)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한충희, 「정치구조의 정비와 정치기구」, 『한국사』 23, 1994.
- 한충희, 「조선초기 육조속아문연구 2 - 관직의 정비를 중심으로」, 『계명사학』 12,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