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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8 기준 최신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유교 의식에 따라 하늘에 지내던 제사.

개설

환구제(圜丘祭)는 원구제(圓丘祭)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관념에 따라 그 단을 둥글게 만든 데서 기원하였다.

전근대 중국에서 자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며 내세운 사상이 중화(中華)라면, 이 중화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의례가 바로 하늘에 대한 제사였다. 하늘의 뜻을 대변하는 사람이 천자(天子)이며, 하늘의 명 곧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특별한 존재라고 주장했는데, 천자가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가 바로 원구제였다. 『예기(禮記)』에는 ‘천자는 하늘과 땅에 제사하고, 제후는 경내의 산천에 제사한다[天子祭天地 諸侯祭山川].’는 유교적 제사의 원칙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원구제가 천하에서 오직 한 사람, 천명을 받은 천자만이 시행할 수 있는 의례이며, 원구제를 시행하는 나라가 곧 천자가 다스리는 황제국임을 뜻한다.

원구제는 고려시대에 유교적인 국가 예제(禮制)인 오례(五禮)가 시행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황제국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시대별로 제사의 시행과 중단이 반복되면서 대한제국시대까지 이어졌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유교를 치국(治國)의 이념으로 설정하면서 중국과 같은 방식의 제천(祭天) 의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는 국가 의례의 구성 요소인 오례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원구제는 최고 등급의 국가 제사로 설정되었다. 또한 실제로 원구에서 제사를 지낸 사례도 「예지」 및 연대기에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이처럼 원구제를 시행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국가인 고려를 황제국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고려, 송나라, 요나라 3국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던 10~12세기 무렵, 고려는 송나라와 요나라에 형식적으로 사대(事大)하였지만 실제로는 황제국임을 주장하였다. 폐하·태후·황제 등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고 조종(祖宗)에게 묘호(廟號)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황제만 지낼 수 있는 원구제도 시행하였다.

그러나 무신정권을 거쳐 황제국을 표방한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뒤에는 원구제를 지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공민왕대에 이르러 다시 시행하였으나, 이후 원(元)·명(明) 교체의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원구제를 제대로 지내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조선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명나라 중심의 세계 질서를 인정하고 사대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황제와 제후로 각각 설정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 따라, 이후 조선은 제천 의례를 시행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대부터 세종대 중반까지는 고려시대 이래의 관행이며, 조선은 중국의 봉토(封土)가 아니라 단군(檀君)에 의해 세워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독자적인 지역이라는 이유 등으로 원구제를 시행하였다. 다만 왕의 친제(親祭)가 아니라 신하를 보내 기우제(祈雨祭)를 시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나마 이것마저도 명나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였고, 대다수의 유학자들은 황제의 의례를 제후가 시행하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였다. 결국 세종대 중반에, 원구제의 권위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는 세종의 정치적 자신감에 따라 원구제는 폐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457년(세조 3) 1월 15일, 세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원구단에 나아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며 조선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면서 바뀌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조카를 밀어내고 왕이 된 세조는 정통성이 약했는데, 그에 반대하여 단종 복위를 꾀한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새로운 형태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그는 즉위 직후 통치 방식을 재상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에서 왕이 주도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 바꾸었다. 또 직전법(直田法)을 시행하여 경제 질서를 회복하고, 보법(步法)을 실시하여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 다양한 개혁을 감행했는데, 그와 더불어 관념상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황제의 의례인 원구제를 시행하였다.

세조는 원구제를 매년 정월 15일에 정기적으로 시행하도록 하되, 그 전날 시행되는 종묘제와 연결시켰다. 또한 그 의식은 명나라의 황제가 행하는 의례와 비슷하게 만들었으며, 반드시 왕이 친히 제사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원구 친제는 세조 연간에만 7차례나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원구제는 제후에 불과한 왕의 지위를 황제에 비견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유교의 보편적 논리 및 당시 유학자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았다. 그 결과 세조가 승하하자 즉시 폐지되었고, 이후 400여 년간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원구제는 이후 고종대에 다시 모색되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국권 침탈이 한창 진행되던 1894년(고종 31) 1월 14일, 국가 제사에 대한 개혁안에 원구제 항목이 들어 있었다. 이때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 속에서 그 시행 여부가 논란이 된 과거와는 달리, 조선의 자주권과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상하의 보편적인 인식 속에서 그 방안의 하나로 등장하였는데, 2년 뒤에 편찬된 조선의 마지막 예전인 『대한예전(大韓禮典)』에 구체적인 의식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왕의 친제는 국내외의 정세 변화 때문에 즉시 시행되지 못하였다.

1895년(고종 32)에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고, 다음 해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이해에 고종은 의정부(議政府) 찬성(贊成) 조병직(趙秉稷) 등을 보내 처음으로 원구제를 시행하였고, 다음 해인 1897년(고종 34) 1월 25일에 다시 신하를 보내 원구단에서 기곡대제(祈穀大祭)를 지냈다.

아관파천 이후 열강들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의 여론이 고종의 환궁을 강력하게 요구했는데, 그 결과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하였다. 그 당시 조선은 개화파와 수구파를 막론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이 시대적인 과제임을 공감하는 분위기 속에서 제국(帝國)의 건립을 꾀하였다. 같은 해 8월 16일에 중국의 건양(建陽)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9월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이때 즉위식 장소를 원구단으로 결정하였고, 그에 따라 과거에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南別宮) 자리에 새로운 제단을 설립하였다. 제단은 도성 밖 남쪽 즉 남교(南郊)에 설립한다는 유교적 원칙에서 벗어나 원구단을 궁궐 옆 동쪽에 건립함으로써, 유교의 의례보다는 원구제가 상징하는 황제의 권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1897년 10월 12일 새벽에 고종은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내 자신의 즉위를 고하고, 제사가 끝난 뒤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새 황제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으며, 대한제국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국내와 세계에 선포하였다. 그 뒤 1899년(광무 3)에 신주를 모시는 장소인 황궁우(皇穹宇)가 마련되었고, 제단의 좌우에는 동무(東廡)서무(西廡)가 건립되었으며, 1901년(광무 5)에는 원구단의 위쪽에 지붕을 덮는 등 시설물의 보완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원구제는 계속 시행되어 조선의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러내는 데 이바지하였으나, 결국 10여 년 뒤 일제의 의해 국가가 강점되자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원구제의 종류는 시기별로 달랐다. 고려시대에는 정월 상신일(上辛日)에 기곡제를 지내고, 맹하(孟夏)에 택일하여 우사제(雩祀祭)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도 태조~세종대 중반 및 세조대에는 이러한 형식을 유지하였는데, 다만 세조 연간에는 정월 상신일을 정월 15일로 확정하여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반면에 대한제국 때는 동지(冬至)와 정월 상신일에 제사를 지내고, 그 대신 우사제를 폐지하였다.

제사 대상은 세월이 지날수록 확대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상제(上帝) 및 동·서·남·북·중앙의 오제(五帝), 태조의 신위에 제사를 드렸는데, 이는 조선세종대 중반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오방제를 설정한 것은 한(漢)·당(唐) 시대의 오행설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세조 연간에 이르러, 상제는 하나뿐이라는 관념을 내세운 명나라 제도에 따라 오방제는 폐지되고, 호천상제(昊天上帝) 1위(位)만 천신(天神)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다양한 종류의 신위들을 합사(合祀)하였다. 즉 호천상제 및 황지기(皇地祇), 태조가 천·지·인의 주신이었으며, 여기에 대명(大明), 풍운뇌우(風雲雷雨), 야명(夜明), 성신(星辰), 동해·서해·남해·북해의 4해(海), 악독(嶽瀆), 산천(山川) 등 천지의 다양한 신위들이 추가된 것이다. 고종 대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 오성(五星), 이십팔수(二十八宿), 주천성진(周天星辰), 사토(司土) 등이 추가되었다.

원구제의 절차를 1457년(세조 3)에 규정된 ‘환구친사의(圜丘親祀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식의 절차는 크게 제사의 준비, 대가출궁(大駕出宮), 행례(行禮), 대가환궁(大駕還宮)의 4단계로 구성되었다. 제사의 준비 과정에는 7일간의 재계(齋戒)와, 3일 전부터 이루어지는 신좌(神座)·대차(大次)·위차(位次)의 마련 및 제기·제물 등의 진설(陳設)이 포함된다. 주목할 점은 제사를 모시는 신위가 많고 신위 간에 등급 차가 있기 때문에 각각의 신위에 별도의 희생을 올린다는 것이다. 즉 상제·황지기·태조·대명·야명·성신 등에게는 각각 송아지 1마리씩을, 풍운뇌우, 4해(海), 악독·산천 등에는 양(羊)과 돼지[豕] 1마리씩을 각각 바쳤다. 대가출궁은 제사 당일 왕의 대가가 궁궐을 나서는 과정이다.

행례는 폐백을 드리는 전폐(奠幣)와 음식을 드리는 진숙(進熟)으로 크게 구분된다. 먼저 폐백은 대상에 따라 분헌관(分獻官)을 두어 바친다. 즉 왕이 주신(主神)인 상제·황지기·태조에게, 세자는 좌분헌관이 되어 대명·성신·4해에게, 영의정(領議政)은 우분헌관으로서 야명·풍운뇌우·해독산천에게 각각 폐백을 드린다. 폐백을 마친 뒤에는 희생의 머리를 태우고, 희생의 털과 피인 모혈(毛血)을 올리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 과정은 신위를 불러오는 역할을 하였다.

음식을 드리는 과정은, 먼저 신위에 진찬(進饌)을 한 뒤 삼헌례(三獻禮)를 시행한다. 삼헌은 술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 순서로 진행된다. 왕이 먼저 상제와 황지기에게 술을 올린 뒤 축문을 읽고, 그 뒤에 배위(配位)에게 술잔을 올린다. 초헌이 끝나면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이 동일한 의례를 거행한다. 삼헌이 끝나면 왕이 제수로 쓰인 술과 고기를 맛보는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행한 뒤 자리로 돌아간다. 제기를 거두고, 우분헌관이 천신의 폐백을 태우는 과정을 살펴보는 망료(望燎) 다음 지기의 제물을 묻는 과정을 살피는 망예(望瘞)를 행한다. 이로써 예는 끝나고 왕과 집사관 등이 퇴장한다. 대가환궁은 제사가 끝난 뒤 왕이 궁궐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대한예전(大韓禮典)』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송사(宋史)』
  • 『명집례(明集禮)』
  • 『명회전(明會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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