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사제(雩祀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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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기우(祈雨)를 목적으로 지낸 제사.

개설

우사제는 고려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는데, 매년 4월 원구단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와 오제(五帝)에게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모든 제사가 제후국의 격식에 맞게 재편되면서 천자가 제천 의례를 행하는 원구단이 폐지되었고, 그에 따라 우사제는 독립된 제사로서 중사(中祀)의 하나가 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정기적인 제사는 매년 4월에 거행하였으며, 가뭄이 들면 비정기적으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본래 우사제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기우를 위한 제사였으나, 기우의 기능을 전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사제는 계속 국가의 사전(祀典) 체제에 속해 있다가 1908년(융희 2) 예제를 개정할 때 폐지되었다.

연원 및 변천

‘우(雩)’는 춤을 추며 비를 비는 형상, 혹은 비를 갈구하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소리를 뜻한다. 『예기(禮記)』「월령(月令)」의, ‘중하(仲夏)인 5월에 대우를 지낸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만물이 자라는 5월에 비가 흡족하게 내려 수확이 풍성하기를 바라는 의례 중 하나였다.

우사제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우사제는 독립된 제사가 아니라, 원구단에서 호천상제와 오제를 모시고 4월에 지내는 기우제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나라의 모든 제사가 제후국의 지위에 맞추어 재편성되었고, 그 결과 제천 의례를 지낼 수 없었다. 그에 따라 우사제는 독립된 제사로 설정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동대문 밖에 우사단을 새로이 만들고, 구망(句芒)·축융(祝融)·후토(后土)·욕수(蓐收)·현명(玄冥)·후직(后稷) 등 여섯 신위를 모셔 제사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지낸 기우제는 우사제 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가뭄이 들면 종묘(宗廟)·사직(社稷)·풍운뇌우(風雲雷雨)·악해독(嶽海瀆)·명산대천(名山大川) 같은 다양한 신을 모시고 기우제를 지냈다. 따라서 우사제의 기우 기능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우사제의 대상인 신들이 지위가 낮고, 비를 부르는 데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신위는 구망, 축융, 후토, 욕수, 현명, 후직의 순으로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게 배치하였는데, 서쪽을 상위로 하였다. 의식의 절차는 전폐(奠幣),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음복(飮福), 철변두(徹籩豆)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초헌관(初獻官)이 망예(望瘞)를 행한 뒤 예를 마쳤다[禮畢]. 비정기적인 기우제의 의식 절차도 이와 비슷하였으나, 음복을 행하지 않는다는 점과 헌관(獻官)이 1명이란 점에 차이가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농경 사회에서 기우제가 지니는 의미는 매우 컸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에 원구단에서 거행되던 우사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위상이 현저히 약해졌다고 할 수 있다. 제천 의례를 행할 수 없었던 조선에서는 우사제의 대상도 천신(天神)이 아닌 지기(地祇)였으며, 그 때문에 실제 기우의 기능은 다른 제사를 통해 수행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작과비평사, 2009.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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