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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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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배릉 |
한글표제 | 배릉 |
한자표제 | 拜陵 |
대역어 | 산릉친행제(山陵親行祭) |
상위어 | 길례(吉禮), 왕조례(王朝禮) |
동의어 | 배릉의(拜陵儀) |
관련어 | 능침(陵寢), 능행(陵幸), 산릉(山陵), 오례(五禮), 왕릉(王陵), 왕후릉(王后陵)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배릉(拜陵)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4년 9월 14일 |
국왕이 선대 국왕과 왕후의 능에 참배하는 의식.
내용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왕이 선왕, 선후의 능에 참배하기 위한 능행(陵幸)이 있었다. 고려시대 들어 유교 예제에 입각한 왕실의례가 정립되면서 왕의 능행은 더욱 빈번해졌다. 예컨대 『고려사』지(志)에는 배릉의(拜陵儀)가 규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왕이 능에 참배하기 위해 출발하기 하루 전에 태묘에서 아뢰기를 평상시의 의식대로 하며, 담당 관사는 미리 참배할 능과 능실(陵室) 안을 정결하게 소제하여 정숙하게 하고, 상사국(尙舍局)은 능의 근처에 행궁을 마련하고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왕의 자리를 깔며, 행궁은 모두 능 앞에 적당한 곳을 가려서 마련하며 능실 곁의 적당한 곳에 왕이 잠깐 쉴 수 있는 소차(小次)를 마련한다.”이다. 고려시대 왕이 능행하는 이유는 물론 능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는데, 고려시대의 능 제사는 오례(五禮) 중의 길례(吉禮)에 해당했다.
그런데 『세종실록』「오례의」 ‘길례’에는 배릉의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능행’과 ‘배릉의’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세종실록』「오례의」에서는 ‘능행’과 ‘배릉의’를 ‘길례’가 아닌 ‘흉례’에 규정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오례의」에서 ‘배릉의’를 ‘흉례’에 규정한 이유는 ‘배릉의’를 상장례의 일부분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세종실록』「오례의」에서는 ‘배릉의’를 ‘산릉친행제의(山陵親行祭儀)’라는 이름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하지만 ‘산릉친행제의’는 상장례의 일부분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삼년상 이후에도 계속해서 거행되어야 하는 의례로 간주할 수도 있었다. 이에 따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길례 항목에 ‘배릉의’가 별도로 규정되었다. 이에 의하면 ‘배릉의’는 ‘배릉결정(拜陵決定)에 따른 후속조치’, ‘진설(陳設)’, ‘거가출궁(車駕出宮)’, ‘행례(行禮)’로 구성되어 있다.
‘배릉 결정에 따른 후속조치’는 말 그대로 배릉이 결정된 후 예조(禮曹)에서 취하는 후속 조치들이다. 만약 능의 위치가 궁에서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예조에서 직접 후속 조치를 담당하여 거행하지만, 하룻밤 이상을 지내야 할 거리에 있다면 2일 전에 대신을 종묘에 보내 고유(告由)하였다.
‘진설’은 왕이 출발하기 1일 전에 먼저 거행하였는데, 능사(陵司)에서는 능침의 내외를 소제하였고, 전설사(典設司)에서는 왕이 머물 대차(大次)와 소차(小次) 및 시신과 종친, 문무백관들이 머물 차(次)를 설치하였다. 배릉 당일에는 집례(執禮)가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의 자리 및 제집사(諸執事)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또 배릉 직전에 능사는 다시 한 번 능침의 내외를 소제한 후 신좌(神座), 향로(香爐), 향합(香盒), 촉(燭) 등을 설치하였다.
‘거가출궁’은 왕이 궁궐을 떠나 능으로 행차하는 절차에 관한 의례이다. ‘행례’는 배릉에서 가장 중요한 참배의식이었다. 행사 5각, 즉 약 1시간 15분 전에 전사관(典祀官)과 능사(陵司)에서는 제물을 제기에 담았다. 약 45분인 3각 전에는 배릉에 참여할 모든 관리들이 제례 때 입는 엷은 색의 담복(淡服) 차림으로 각자의 자리에 갔다. 약 15분인 1각 전에는 제집사와 아헌관, 종헌관이 제자리로 갔다. 그 직후에 왕은 담청색의 예복인 참포(黲袍) 차림을 하고 여(輿)를 탄 채 대차에서 나와 신문(神門) 밖에까지 가서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손을 씻고 나온 왕은 동쪽 계단을 통해 판위(版位)로 가서 사배(四拜)를 올렸다. 왕이 사배를 올릴 때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같이 사배를 올렸다. 이어서 왕이 초헌례를 행하고 제자리로 가면, 그 뒤를 이어 아헌관과 종헌관이 아헌례와 종헌례를 거행하였다. 삼헌 절차가 모두 끝나면, 왕은 다시 사배를 올리고 소차로 되돌아갔다가 환궁하였다.
배릉 때의 축문에서 왕은 자신과 선왕의 관계에 따라 ‘효자(孝子)’, ‘효손(孝孫)’, ‘효증손(孝曾孫)’ 중에서 합당한 용어로 자기 자신을 호칭했다. 배릉 때의 술은 청주(淸酒)가 사용되었다. 제물은 찬탁(饌卓)과 협탁(俠卓)에 차려졌는데, 찬탁에는 20개의 제기에 중박계(中朴桂), 산자(散子), 다식(茶食), 실과(實果) 등이 담겼고, 협탁에는 12개의 제기에 떡과 탕 등이 담겼다.
조선시대의 배릉은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황제 의례로 격상되었다. 이처럼 한국사에서 배릉은 역사적 변천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 핵심은 각 시대의 주류 종교 및 국가 체제에 따라 배릉 의식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배릉 의식은 한국의 역사적 변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용례
예조에서 배헌릉의(拜獻陵儀), 광효전삭망친향의(廣孝殿朔望親享儀) 및 섭행의(攝行儀)를 계하였는데, 배릉의(拜陵儀)에 말하기를, “하루 앞서 충호위(忠扈衛)가 대차(大次)를 능소 근방에 설치하고, 소차(小次)는 능실(陵室) 곁에 적당하게 설치하여 시신(侍臣)은 대차의 앞에다 위차를 정하는데, 문관은 왼편이며, 무관은 오른편이요, 배제(陪祭)하는 종실 이하 문무 여러 관원의 위차는 또 대차의 앞에다 하는데, 지형에 따라 적당하게 하고, 능사(陵司)는 그의 소속을 거느리고 능실을 소제하며, 찬만(饌幔)은 능소 근처에 설치한다. 교서 관원(校書官員)이 축판(祝版)을 받들어 올리면, 전하는 보기를 마친다. 근신이 받들고 나와 유사(攸司)에게 준다. 통례문은 전하의 판위를 능실의 동남쪽으로 서향되게 설치하고, 아헌관·종헌관의 위차는 전하의 판위에서 뒤로 서향되게 하고, 종실 이하 문무 여러 관원의 위차는 신도(神道)의 좌우로 설치하는데, 중심이 머리가 되고, 관위(官位)가 다르면 여러 줄로 서게 하는데, 모두 북향이다. (하략)” 하였다(『세종실록』4년 9월 14일).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대한예전(大韓禮典)』
-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의 행차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