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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4일 (수) 22:0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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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쇄마 |
한글표제 | 쇄마 |
한자표제 | 刷馬 |
동의어 | 고마(雇馬) |
관련어 | 쇄마가(刷馬價), 쇄마법(刷馬法), 고마법(雇馬法), 고마조(雇馬租), 고마전(雇馬錢), 고마청(雇馬廳) |
분야 | 경제/재정/공물·진상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박도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쇄마(刷馬) |
사신의 왕래나 세폐·진상물의 운반, 지방관 교체 시 등에 품삯을 주고 민간의 말을 이용하는 것.
개설
조선전기에는 사신의 왕래나 중국에 연례로 바치는 공물인 세폐(歲幣)·진상물의 운반, 지방관 교체 시와 같이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말이 필요하면 역참에 소속된 말과 인부를 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부터 대가를 주고 민간의 말을 대가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1681년(숙종 7)에는 이를 법제화하였는데, 말 이용에 대한 대가(代價)는 대동미(大同米)로 지급하였다. 진상품 운반과 공무로 지방관이 왕래할 때는 거리를 계산하여 그 대가를 지급하였다.
내용 및 특징
각 군현에서 중앙으로 올라가는 모든 공물·진상물은 당연히 쇄마·쇄선(刷船)의 역(役)이 필요하였다. 공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공납제(貢納制)에서는 군현 차원에서 운반 비용을 책임져야 했다. 따라서 쇄마는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눈에 띄는 부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부담을 실제로 감당해야 했던 각 군현에서는 공물·진상물의 마련만큼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경제적 조건이 넉넉하지 못한 군현에서는 수령이 교체될 때에 드는 쇄마 비용 또한 감당하기 어려워하였다. 통상(보통의 경우에는) 어떤 사람이 수령으로 제수되면, 그가 부임지에 도착할 때까지의 행정 절차와 그에 따른 비용을 부임지 쪽에서 주관하고 부담하였다. 여기에는 많은 경비가 들었다. 이 모든 경비를 쇄마가(刷馬價)라 불렀다. 쇄마가는 이처럼 단순히 교통비만을 뜻하지는 않았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두 대동사목(大同事目)에서 감사와 수령의 이동과 관련된 쇄마 항목은 다음과 같다.
① 수령의 임기가 다하여 바뀔 때, 새 수령을 맞고 옛 수령을 보내는 데 드는 쇄마가는 모두 대동미로 지급한다. 법전에 따라 큰 읍 대목(大牧) 충주·청주·공주·홍주 네 고을은 말 20필(匹)을 지급하고, 이하 군현은 말 15필을 지급한다. 절대로 더 지급하지 않는다.
② 수령이 공적인 일로 상경할 때, 일정이 4일 이하이면 쇄마를 지급하고, 5일 이상이면 4바리[駄]를 지급한다. 바리는 소나 말 등에 싣는 짐의 단위를 말한다. 도내에서 공적인 일로 왕래할 때에는 2바리를 지급한다. 사적으로 출입할 때와 근친(覲親)·병친(病親)·소분(掃墳)·과거(科擧) 등으로 휴가를 냈을 때에는 각각 2바리를 지급한다. 그 값은 모두 대동미로 계산하여 지급하되, 혹 부족하면 아양마(衙養馬)를 사용하고 절대로 대동미를 남용하지 않는다.
③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의 수미(收米)는 넉넉히 지급한다. 새 관원을 맞고 옛 관원을 보낼 때와 관찰사(觀察使)·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거느리는 각 영의 하리, 즉 영리(營吏)가 서울에 머물 때 드는 식량과 여러 가지 영중(營中)에서 바꾸는 물건은 모두 감영·병영·수영의 곡식인 영미(營米)로 지급한다. 절대로 관할 고을들에 부과하지 않는다. 해운판관(海運判官)이 사용하는 종이[紙地] 등의 물건은 전처럼 각 읍에서 돌아가며 지급하도록 윤회분정(輪回分定)하지만, 그 값은 대동미로 지급한다.
공물의 운반비와 사신·관원들의 교통비에 해당하는 쇄마가(刷馬價)·쇄선가(刷船價)는 백성들에게 대단히 무거운 부담이었다. 현물 공납제에서는 그에 대한 수취 규정 자체가 없었다. 쇄마·쇄선의 가격이 얼마가 들던지 그것은 각 관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때로 말 1필의 쇄마가가 거의 쌀 100두(斗)에 이르기도 하였다.
더구나 쇄마가는 여러 가지 불법적인 용도로 전용되었다. 쇄마가는 임시로 필요할 때마다 거두었지만 나중에 더 이상 필요 없어졌을 때에도 기존의 쇄마가를 그대로 걷어 다른 용도에 쓰는 경우가 많았다. 현물 공납제에서는 쇄마가의 수취도 다른 공물가 수취와 마찬가지로 전결(田結)에 윤회분정하였다. 대동법 실시 이전에도 정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무질서한 쇄마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
대동법 실시 이후 대동세를 서울 선혜청에 운송하는 데 드는 쇄마가·쇄선가는 대동미·포로 지급되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대동사목에 따르면 그런 비용은 충청도에서 3,962석(石), 전라도에서 4,329석에 달하였다. 경상납비 전체에서 운반 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충청도가 약 8%, 전라도가 약 7% 정도였다. 이외에도 풍흉에 따라 쇄마 비용을 조정하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드는 비용인 칙수(勅需)의 불규칙한 운송비까지 대동미에서 지급하여, 운반에 따른 변수를 대동미 내로 흡수시켰다.
변천
쇄마는 사신(使臣)이나 지방관의 행차에 필요한 말을 구입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제도였다. 그러나 광해군·인조대를 거치면서 점차 민간인의 말을 돈으로 사서 이용하는 쇄마고립제(刷馬雇立制)가 시행되었고 이로써 고마법(雇馬法)이 성립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의 세폐, 진상물의 운송뿐 아니라 관찰사·수령·군관 등 지방관의 잦은 교체와 영송(迎送) 등에 쓰이는 말의 수요를 좀처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의주에서 한양에 이르는 평안도·황해도의 서로(西路) 지방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처음 고마법이 실시될 때에는 병조(兵曹)나 호조(戶曹), 또는 선혜청(宣惠廳)의 국고나 지방의 대동저치미(大同儲置米)로 충당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지방군현에서 재정 충당을 목적으로 점차 민결(民結)에서 고마조(雇馬租)·고마전(雇馬錢) 등을 징수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에 고마고(雇馬庫) 또는 고마청(雇馬廳)이라는 창고를 운영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고마고·고마청은 민고(民庫)의 한 형태로서 18·19세기 농촌 사회에 광범위하게 설치되었다. 그러나 규정된 쇄마가 보다 지나치게 많은 양을 수취함으로써 농민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기념논총간행위원회 편,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벽사 이우성 교수 정년퇴직 기념 논총(상, 하)』, 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0.
- 김덕진,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 선인, 2002.
-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Ⅲ』, 일조각, 1988.
- 김용섭, 『(증보판)한국 근대 농업사 연구(상): 농업 개혁론·농업 정책』, 일조각, 1984.
- 김덕진, 「16~17세기 쇄마역(刷馬役)의 증가와 고립」, 『조선시대사학보』 9, 1999.
- 김덕진, 「조선 후기 지방 관청의 고마고(雇馬庫) 설립과 운영」, 『한국사연구』112, 2001.
- 이정철, 「대동미·포의 구성: 『호서대동절목』·『전남도대동사목』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19, 2005.
- 조병로, 「조선 후기 교통 발달에 관한 연구: 교통수단으로서의 역마 확보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57,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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