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고(雇馬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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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지방관을 영송하거나 공용 물품을 운반하기 위한 말의 구입 및 임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지방 관청이나 역참에 설치한 재정 기구.

개설

고마고(雇馬庫)는 조선후기에 사객의 왕래, 세폐, 진상물의 운반 및 지방관의 영송 및 접대를 위해 소요되던 말의 구입비 및 임대비를 마련하기 위해 지방 관청이나 역참에 설치한 재정 기구로, 고가청(雇價廳) 또는 고마청(雇馬廳)이라고도 했다.

조선초기에는 역호(驛戶) 및 마호(馬戶)가 마위전을 경작해서 얻은 재원으로 입마(立馬)하였다. 그러나 점차 과중한 역역(驛役)으로 인해 역호가 도산하거나 말 값이 상승하면서 역마를 조달하기가 어렵게 되자, 민간의 말을 돈을 주고 사는 역마고립제를 시행하였다. 그에 따라 역참에서는 말의 구입 비용 및 임대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민고의 일종인 고마고를 설립해 운영하게 되었다.

내용

조선시대에는 물자의 운송이나, 수령의 교체 및 사객의 왕래 등에 대부분 말을 이용하였다. 이때 필요한 말은 지방 관청의 경우 관속(官屬)에게 요역(徭役)의 형태로 부과한 쇄마역(刷馬役)을 통해, 역참의 경우 역민들의 입마역(立馬役)을 통해 조달하였다. 이러한 쇄마입역제는 향리 등 관속의 유망(流亡)과 피역(避役), 역민 등 역호의 유망, 말 값의 상승, 마필의 남승(濫乘) 등 많은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16~17세기에는 요역제가 화폐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지방 관청에서는 민간의 말을 돈을 주고 사는 쇄마고립제(刷馬雇立制)를, 역참에서는 국비로 말을 사 각 역에 나누어 배치하는 역마고립제(驛馬雇立制)를 시행하였다. 이처럼 관청이나 국가에서 말을 사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후기에는 민결(民結)에서 징수한 대동미의 저치미(儲置米) 또는 유치미(留置米)로 마필을 구입하거나, 별도의 목돈을 마련하여 그 이자로 마필 구입비를 충당하였다. 또한 고마고를 비롯해 보민고(補民庫), 대동고(大同庫) 등 다양한 형태의 민고(民庫)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고마고는 대개 민결에서 고마조(雇馬租) 또는 고마전(雇馬錢)을 징수해 재원을 마련한 다음 그것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아 말을 사는 데 쓰거나, 고마전(雇馬田)을 매입해 그 수입으로 지출에 충당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용례

평양의 경우 고마고의 세입은 총 2,063냥 3전 2푼으로, 군향모전(軍餉耗錢)·화전세(火田稅)·민결전(民結錢)·공삼세전(公三稅錢)·세폐미(歲幣米)와 순영(巡營)의 순전모(巡錢耗) 등을 통해 충당하였다. 세출은 고마고 색리(色吏)의 지필묵가(紙筆墨價)와 쇄마가, 발군료(撥軍料), 짐꾼[負持軍]의 품삯, 순영의 경비 등으로 1,128냥 1전 3푼이 사용되었다. 그밖에 신관 및 구관의 쇄마가와 재마가(載馬價), 관찰사의 지방 순행비 등으로 935냥 1전 9푼이 쓰였다.

또 『평안도각읍민고정례절목(平安道各邑民庫定例節目)』에 따르면 평안도 성천(成川)의 경우, 고마고 수입은 호봉(戶捧) 1,146냥, 환모절전(還耗折錢) 295냥 6전, 전세(田稅) 및 타작(打作) 24냥 등 총 1,606냥 5전이었다. 이 돈은 4대 명절에 제수를 실어 나르는 비용[四名日祭需駄價], 정조호장(正朝戶長)·수령·향리의 상경(上京) 및 도내 출장에 따른 쇄마가(刷馬價), 절사지공물(節使支供物), 상납문서(上納文書) 재마가, 신관 및 구관 영송에 따른 쇄마가, 고마고 운영비 등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과천의 경우 처음에는 민호의 우마를 이용해 공물을 수송했으나, 정조의 화성 원행 이후 고마고를 설립하고 상진조(常賑租) 1,500석을 획부(劃付)하여 그 이자로써 재정을 충당하였다. 또 경상도 소촌역(召村驛)의 경우 복호(復戶)에서 징수한 결가(結價)와 둔답(屯畓)에서 징수한 돈 800냥으로 대동고(大同庫)와 둔답고(屯畓庫) 등을 운영해 입마가를 확보하였다.

고마고는 시행 초기에는 대부분 민결에서 세를 징수해 재정을 확보하였으나, 점차 별비전(別備錢)·시장세(市場稅)·무부포(巫夫布)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일반 백성의 부담이 가중되어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원래 고마고는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 설립된 것이었으나, 그 운영상에서 많은 폐단이 나타났다. 점차 고마고는 관리들의 부정에 의해 재정을 낭비할 뿐 아니라 정상적인 운용비 이상을 징수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조정에서는 이를 바로잡기 위한 방안들이 자주 제시되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농민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하는 등 많은 사회적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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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읍지(京畿邑誌)』
  • 『목천현지(木川縣誌)』
  • 『각읍지급사례(各邑誌及事例)』
  • 『평안도민고정례절목(平安道民庫定例節目)』
  •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
  • 『충청도대동사목(忠淸道大同事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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