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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5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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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영응대군 이염 |
한글표제 | 영응대군 이염 |
한자표제 | 永膺大君 李琰 |
분야 | 왕족/왕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전기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윤경수, 김구진 |
자 | 명지(明之) |
호 | 서곡(西谷) |
봉작 | 영응대군(永膺大君) |
시호 | 경효(敬孝) |
출신 | 양반, 왕족 |
성별 | 남자 |
출생 | 1434년(세종 16) |
사망 | 1467년(세조 13) 2월 2일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陽州) 팔곡산(八谷山) (현)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
증조부 | 이자춘(李子春) |
조부 | 이성계(李成桂): 태조(太祖) |
부 | 이도(李*): 세종(世宗) |
모_외조 | 소헌왕후(昭憲王后): 청송 심씨(靑松沈氏), 심온(沈溫)의 딸 |
형제 | (형)이구(李珦): 문종(文宗) (형)이유(李瑈): 세조(世祖) (형)이용(李瑢): 안평대군(安平大君) (형)이구(李璆): 임영대군(臨瀛大君) (형)이여(李璵): 광평대군(廣平大君) (형)이유(李瑜): 금성대군(錦城大君) (형)이림(李琳): 평원대군(平原大君) (형)이염(李琰): 영응대군(永膺大君) (누이)정소공주(貞昭公主) (누이)정의공주(貞懿公主): 연창위(延昌尉)의 처, 안맹담(安盟聃)의 처 |
처_장인 | (첫째부인)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해주 정씨(海州鄭氏), 정충경(鄭忠敬)의 딸 →(자녀)무후 (둘째부인)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 송복원(宋復元)의 딸 →(자녀)1녀 (첩)금이(今伊) →(자녀)1남 |
자녀 | (1녀)길안현주(吉安縣主): 구수영(具壽永)의 처 (서1자)이원(李源): 청풍부정(淸風副正), 청풍군(淸風君) (서1녀)배사종(裵嗣宗)의 처 (서2녀)조온(趙穩)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영응대군 이염(永膺大君 李琰) |
총론
[1434년(세종 16)~1467년(세조 13) = 34세].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세종(世宗)의 적출 8남 2녀 중에서 제 8왕자. 봉작(封爵)은 영응대군(永膺大君)이다. 자는 명지(明之)이고 호는 서곡(西谷)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서 영의정(領議政)심온(沈溫)의 딸이다. 친형은 문종(文宗), 세조(世祖),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 광평대군(廣平大君)이여(李璵), 금성대군(錦城大君)이유(李瑜), 평원대군(平原大君)이임(李琳)이고, 친누이는 정소공주(貞昭公主)와 정의공주(貞懿公主)다.
세종 시대의 활동
1441년(세종 23)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해졌다가 1443년(세종 25)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가, 1447년(세종 29) 3월 다시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은 막내아들 영응대군이염을 다른 왕자들보다 총애하여 진귀한 물품을 자주 내려주었고,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도 앞으로 잘 보살펴주도록 부탁하였다. 1445년(세종 27) 4월 12세 때 통례문(通禮門) 판관(判官)송복원(宋復元)의 딸과 혼인하였다. 1446년(세종 28) 13세 때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승하하였다. 1447년(세종 31) 부인 송씨에게 고질병이 있어서 소박하고, 6월 한성부 윤(漢城府尹)정충경(鄭忠敬)의 딸과 혼인하였다. 정충경의 누이는 태종의 제 2왕자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부인이고, 그 아들 정종(鄭悰)은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혼인하였다. 1450년(세종 32) 세종이 병환이 위독해지자, 총애하는 막내아들 영응대군이염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였고, 1450년 2월 17일 영응대군의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였다.
문종~단종시대의 활동
1453년(단종 2) 20세 때 둘째 부인 정씨에게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이라 봉작한 관교(官敎)를 거두고, 소박하여 쫓아내었던 첫째 부인 송씨를 다시 맞아들여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으로 봉하였다. 이는 영응대군이 처음 부인으로 맞았던 송씨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춘성부부인정씨가,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 남편인 정종의 누이동생이었기 때문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후원세력을 제거하고자 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1454년(단종 3) 1월 수양대군과 다른 종친들과 함께 단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데 참여하였다. 마침내 영의정수양대군은 풍저창(豊儲倉) 부사(副使)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단종의 왕비로 간택하였다. 송현수는 판관송복원의 아들이므로, 송현수의 딸은 영응대군의 첫째 부인 송씨의 조카이다. 첫째 부인 송씨의 오라버니 송현수는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 사건> 때 세조의 비호로 목숨을 건졌다. 1457년(세조 3) 세종의 제 6왕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順興)에 귀양갔는데, 순흥부사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할 때 송현수도 연루되어 관노(官奴)로 되었다가, 처형당하였다.
세조 시대 활동
1552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자, 왕자들과 종친들은 수양대군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나뉘었으나 당시 19세의 영응대군은 세조의 정변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또 1555년(세조 1) <양혜빈(楊惠嬪)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세종의 제 6왕자 금성대군처럼 적극적으로 단종 복위에 가담하지도 않은 채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일찍이 수양대군에게 그의 장래를 부탁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세조는 영응대군을 특별히 보살펴 주었다. 또 세조가 즉위하였을 때 세종의 적출 왕자 8대군 중에서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제 4왕자 임영대군, 제 6왕자 금성대군, 제 8왕자 영응대군의 3인뿐이었다. 임영대군은 세조를 적극 지지하였으나, 금성대군은 적극 반대하였으므로, 세조는 막내동생 영응대군을 적극 회유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넣으려고 무척 애썼다. 세조가 즉위한 후에 각종 연회에 그를 참석토록 했으며, 관사(觀射)에 입시하도록 하였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의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는데, 세조가 반역자의 집과 노비를 종친들에게 나눠줄 때, 영응대군도 그 노비와 토지를 하사 받았다.
영응대군이염은 글씨와 그림, 음률에 뛰어나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 세조도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1459년(세조 5) 4월 세조가 취로정(翠露亭)에 나아가 농작물의 작황을 살펴 볼 때, 이를 영웅대군이염에게 그림으로 그리도록 하였다. 이해 11월 영응대군이염에게 명하여 선원전(璿源殿)에 가서 태조(太祖) · 태종(太宗) · 문종(文宗)의 영정(影幀)을 받들고 내전(內殿)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1458년(세조 12) 3월 임영 대군과 함께 선원전에 가서 소헌왕후의 영정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이때 영응대군은 역대 제왕들의 영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그림의 훼손된 부분을 보충하여 그려 넣었다. 1463년(세조 9) 세종 때 편찬된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를 언해(諺解)하였다. 1467년(세조 13) 2월 2일 갑자기 병으로 졸하였는데, 향년이 34세였다.
성품과 일화
영응대군이염은 천성이 순일(純一)하고 후덕(厚德)하였다. 또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고, 음률(音律)에도 밝았다고 한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內帑庫)의 진귀한 보물을 막내아들 영응대군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이를 주지 못하고 승하하였는데, 문종이 즉위하자, 곧 내탕고의 보물을 모두 그에게 내려 주었으므로, 궁중의 부고(府庫)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금은보화가 모두 영응대군에게 돌아가서, 그 재물(財物)이 누거만금(累巨萬金)이 되었다. 그러나 영응대군이염은 검소(儉素)하고 절약(節約)하여 사치하지 않았다. 또 어전(御前)에 입시(入侍)할 때에도 자세가 겸손하고 공송하며, 말씨도 삼가고 조심하여 조금도 과실(過失)이 없었다.
영응대군이 태어나서 겨우 말을 할 줄 아는 유년기 시절에 밀납으로 어린아이를 조각(雕刻)하여 만든 화촉(花燭)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초[燭]가 다 타면 반드시 초에 새긴 어린아이가 없어질 텐데…, 나는 차마 못 보하겠다.” 하고, 고개를 돌리니, 세종이 이를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처음에 12세 때 판관송복원(宋復元)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송씨가 고질병이 있었으므로, 세종이 아들의 행복을 위하여 그녀를 버리게 하고, 부윤(府尹)정충경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여린 영응대군은 그녀의 가엾은 모습을 잊지 못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에, 영응대군이 송씨를 그리워하여 후처 정씨를 내쫓고 전처 송씨와 다시 결합하여 살았다. 『세조실록』의 「영응대군 이염 졸기」에서 그를 논평하기를, “처음에는 군부(君父)의 명령 때문에 전처 송씨를 내버렸고, 다음에는 후처 정씨도 또한 내버릴 만한 죄과가 없었는데도 오직 사랑과 미운 감정에 따라서 내쫓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꼽았다.” 하였다.[『세조실록』세조 13년 2월 2일 「영응대군 이염 졸기」]
묘소와 후손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陽州) 팔곡산(八谷山)에 있었는데, 현재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 70번지에 있다.(경기도 시흥시 향토유적 제9호.) 그는 첫째부인 춘성부부인해주 정씨(海州鄭氏)와 둘째부인 대방부부인여산 송씨(礪山宋氏)와 함께 합장되었다. 비문은 그의 딸 길안현주(吉安縣主)의 사돈인 임사홍(任士洪)이 짓고 그 전액(篆額)을 썼으며, 비신(碑身)의 글씨는 기위(騎衛) 부사정(副司正)박경(朴耕)이 썼다.
첫째 부인 해주 정씨는 한성부 윤정충경(鄭忠敬) 딸이고, 정역(鄭易)의 손녀인데, 자녀가 없다. 둘째 부인 여산 송씨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송복원의 딸인데, 길안현주를 낳았다. 갈현현주는 구수영(具壽永)의 처가 되었는데, 구수영의 고손녀가 바로 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仁憲王后)이다. 영응대군은 서출 1남 2녀가 있는데, 아들 이원(李源)은 청풍부정(淸風副正)이 되었다가 아버지의 봉작을 습군(襲君)하여 청풍군(淸風君)이 되었다. 서출 1녀는 배사종(裵嗣宗)의 처이고, 서출 2녀는 조온(趙穩)의 처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사계집(四桂集)』
- 『용재집(容齋集』
- 『목계일고(木溪逸稿)』
- 『점필재집(佔畢齋集)』
- 『택당집(澤堂集)』
- 『담헌서(湛軒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