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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9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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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신익륭 |
한글표제 | 신익륭 |
한자표제 | 申翊隆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군필(君弼) |
호 | 호량(濠梁)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02년(선조 35) |
사망 | 1657년(효종 8) 10월 7일 |
본관 | 평산(平山)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충청도 예산(禮山) |
증조부 | 신승서(申承緖) |
조부 | 신흠(申欽) |
부 | 신감(申鑑) |
모_외조 | 조씨(趙氏): 조인후(趙仁後)의 딸 |
형제 | (형)신익량(申翊亮) |
처_장인 | 청주 한씨(淸州韓氏): 한회일(韓會一)의 딸 |
자녀 | (1자)신만(申曼) (2자)신성(申晟) (1녀)이관(李慣)의 처 (서1자)신곤(申昆) (서2자)신조(申鼂) (서3자)신병(申昺) (서4자)신방(申昉) (서1녀)한계기(韓啓箕)의 처 (서2녀)유벽(柳擘)의 처 (서3녀)이게(李圮自)의 처 圮 自 (서4녀)유광한(柳光漢)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익륭(申翊隆)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 |
총론
[1602년(선조 35)∼1657년(효종 8) = 56세.] 조선 후기 인조 때의 문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시직(侍直)을 지냈는데, 증직(贈職)은 참판(參判)이다. 자는 군필(君弼)이고, 호는 호량(濠梁)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참판신감(申鑑)이고, 어머니 조씨(趙氏)는 승지조인후(趙仁後)의 딸이다. 영의정신흠(申欽)의 조카이고,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송준길(宋浚吉) · 유계(兪棨) · 윤문거(尹文擧) · 윤선거(尹宣擧)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가 함락되어, 부인과 며느리가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아들과 함께 20여 년 동안 전국을 방랑하였다.
인조 · 효종 시대 활동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가 일어나자, 아버지 신감이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군사를 거느리고 변란에 나아갔는데, 그는 지리산(智異山) 승려들을 모집하여 의병을 이끌고 뒤따랐으나, 마침 화친(和親)이 이루어져서 그만두고 말았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9 「시직 신공익륭 묘갈명(侍直申公翊隆墓碣銘)」] 1630년(인조 8) 아니 2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방목』] 12월 건원릉(健元陵)참봉(參奉)으로 있었는데 능 안에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시키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다음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다. 3년 상례를 끝마치자, 재랑(齋郞)에 임명되었다가, 1631년(인조 9) 10월 정릉(靖陵)참봉(參奉)이 되었다. 1635년(인조 13) 세자익위사 세마(洗馬)가 되었다가, 시직으로 승진하였다.[『송자대전』 권179 「시직 신공익륭 묘갈명」, [『승정원일기』인조 8년 12월 4일, 인조 9년 10월 3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청(淸)나라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그는 빈궁(嬪宮)을 호위하여 강화도로 먼저 들어가고 가족들이 그를 뒤따랐다. 강화도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함락되자, 그는 가족들과 자결하기로 약속하고 행궁(行宮)의 앞에서 소나무에 목을 매어 몰래 죽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와 가까운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이 이를 발견하고 그 끈을 풀어주고 간곡히 만류하였으므로 자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행궁(行宮)의 서루(西樓)에서 그의 부인 한씨와 며느리 홍씨는 결국 자결하였다. 신익륭은 병졸들과 함께 빈궁이 머무는 행궁을 둘러싸고 여러 날을 지켰는데, 얼마 안 되어 청나라 사자(使者)가 강화도로 들어와서 청나라 군사들의 약탈을 금지하여 어느 정도 치안이 유지되었다. 그는 아내와 며느리의 시신을 거두어 땅에 묻은 다음에 몰래 강화도를 빠져나와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행재소(行在所)로 말을 달려갔으나, 이미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太宗)홍타지에게 항복하여 화친 조약이 이루어 진 뒤였다.[『송자대전』 권179 「시직 신공익륭 묘갈명」]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명나라와 외교를 단절하고 청나라를 섬기게 되자, 신익륭은 맏아들 신만(申曼)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20여 년 동안 유랑하며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만년에 신익륭은 건강이 매우 나빠져서 충청도 회덕(懷德)에 우거(寓居)하였는데, 회덕은 아버지 신감의 외가(外家)가 있는 고장이었다. 1657년(효종 8) 10월 7일 충청도 진잠(鎭岑)의 우사(寓舍)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서 눈을 감았는데, 향년이 56세였다.[『송자대전』 권179 「시직 신공익륭 묘갈명」] 진잠은 현재 대전시 유성구 진잠동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의 함락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그의 동생 예친왕(睿親王)도르곤과 함께 8기병(旗兵) 10만 명을 이끌고 1636년(인조 14)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서, 12월 16일 서울 도성에 육박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피난가기로 결정하고 먼저 왕자(王子)와 비빈(妃嬪)들을 먼저 강화도에 피난하게 하였다.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조선 조정의 항복을 빨리 받기 위하여 바로 서울로 직행하였으므로, 인조는 일행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하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라도 전주(全州)로 내려가서 후방에서 전쟁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게 하였다.
인조의 왕비 인렬왕후(仁烈王后)한씨(韓氏)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해인 1635년에 42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므로, 강화도로 피난간 비빈(妃嬪) 중에서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강씨(姜氏)가 내명부(內命婦)를 통솔하고 있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전주에 내려갔고, 봉림대군이 빈궁(嬪宮)을 호위하여 강화도(江都)에 들어갔다. 전주의 분조에는 인렬왕후한씨의 아버지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한준겸(韓浚謙)이 외손자 소현세자를 호위하는 배위 대장(陪衛大將)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왕세자 일행을 보호하였다. 한준겸의 2남 4녀 중에서 맏아들 한회일(韓會一)의 맏딸이 신익륭의 부인 한씨(韓氏)다. 그러므로 신익륭의 처이종 4촌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다. 그때 신익륭은 세자익위사 시직이었으므로 소현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내려가야 했으나 소현세자빈강씨를 호위하여 강화도로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신익륭의 가족들도 뒤따라 강화도로 왔다.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서울의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강화도로 몰려들어 나루터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강화도에 이르자, 신익륭이 말하기를, “예전에 아버지가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계실 때 말씀하시기를, ‘무릇 사물에는 역량이 있어서 한번 가득차면 반드시 한번 기울게 된다.’ 하셨다. 지금 작은 섬에 공사(公私)의 물자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것도 위태로운데, 하물며 지금 섬을 지키는 장수들이 부귀한 집 자제여서 군사 훈련에 익숙하지 않으니, 아마도 장차 어육(魚肉)처럼 참살 당할지도 모르겠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강화도를 지키던 사람들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강화성이 함락되고 말았다.[『송자대전』 권179 「시직 신공익륭 묘갈명」]
강화 유수장신(張紳)이 여러 도(道)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통솔하였으나, 제대로 훈련된 군사들이 아니었다. 충청도 수사(忠淸道水使)강진흔(姜晉昕)이 배를 거느리고 먼저 도착하여 연미정(燕尾亭)을 지켰다.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에서 배를 정비하였는데, 장비(裝備)를 제대로 싣지도 못하였다.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군사 3만 명을 동생 예친왕도르곤에게 주어서, 강화도를 점령하게 하였다. 예친왕도르곤은 삼판선(三板船) 80척에 군사를 태우고, 갑곶진(甲串津)으로 진격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우리의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청나라 군사들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 · 강진흔 · 김경징(金慶徵) · 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다가 도망쳐버렸다.
예친왕도르곤은 8기병을 강화성 밖의 높은 언덕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중관(中官)이 원손(元孫)을 업고 나가서 피했으며, 성에 있던 조사(朝士)도 일시에 도망해 흩어졌다. 봉림대군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出擊)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청나라의 대병(大兵)이 성을 포위하고 예친왕도르곤이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권유하였다. 봉림대군이 한흥일(韓興一)에게 화친에 응하는 척하면서 청나라 진중(陣中)에서 가서 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은 대신(大臣)이 와야만 한다고 하여, 봉림대군은 해창군(海昌君)윤방(尹昉)에게 가도록 하였다. 윤방이 다녀와서 예친왕도르곤이 조정에서 화친을 이룬 일을 말하고 봉림대군과 서로 만나 보기를 원한다고 하자 봉림대군이 이르기를, “저들이 호의를 갖고 나를 유도하는 것인지는 실지로 헤아릴 수 없으나, 일찍이 들으니, 동궁(東宮: 소현세자)도 가기를 원했다고 하니, 진실로 위급함을 풀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청나라 군의 진영 문 앞으로 갔다. 그러자 예친왕도르곤이 역자(譯者)로 하여금 인도해 들이게 하고 경례(敬禮)를 하였다. 저물녘에 대군이 노왕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갔는데, 군사들은 성 밖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은 동서(東西)로 길을 나누어 피차간에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군병을 단속하여 살육을 못하게 하였으며, 청나라 여러 진영으로 하여금 사로잡힌 부녀자들을 되돌려 보내도록 허락하는 동시에, 봉림대군에게 남한산성의 행재소에 글을 올리고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치계(馳啓)하도록 청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 이때 신익륭은 즉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으려고 하자, 봉림대군이 이를 발견하고 그 끈을 손수 풀어주고 예리한 칼을 주면서 타이르기를, “빈궁이 아직 자결하지 아니하였으니, 반드시 빈궁의 자결을 기다린 뒤에 나와 함께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익륭이 세자익위사의 오래도록 있으면서 봉림대군을 오랫동안 호위하였으므로, 예전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았었다. 신익룡이 곧장 그 칼을 당겨서 목에 대고 자진하려고 하자, 주위에서 그 칼을 빼앗았으므로, 자결하지 못하였다. 그의 부인 한씨(韓氏)는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소현세자빈의 명령으로 행궁(行宮)의 서루(西樓)에 들어갔었는데, 청나라 군사 가운데 몽고병이 약탈을 자행하자, 부인 한씨는 며느리 홍씨(洪氏)와 함께 모두 자결하였다.[『송자대전』 권179 「시직 신공익륭 묘갈명」]
얼마 안 되어 청나라 사자(使者)가 들어와서 청나라 군사들의 약탈을 금지하여, 치안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대신들의 부녀자를 보호하고 서울로 송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몽고병의 약탈을 막아 주어, 신익륭은 처와 며느리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봉림대군과 빈궁이 환궁할 즈음에 국구(國舅) 서평 부원군한준겸의 자손으로서 강화도에 행궁(行宮)에 피신해서 있다가 자결한 자가 10여 명이나 되었는데, 신익륭의 부인 한씨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인조는 강화도에 순절한 사람들의 보고를 받고 신익륭의 부인 한씨와 며느리 홍씨 등을 비록하여 여러 사람에게 정문(旌門)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여 그 충렬(忠烈)을 역사에 드러내도록 하였다.
성품과 일화
신익륭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송자대전』 권179 「시직 신공익륭 묘갈명」] 그는 성품이 청담(淸談)을 좋아하고, 물욕(物慾)에 관심이 없었다. 난리를 겪은 뒤로는 더욱 당세(當世)에 출세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 또한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않아서 항상 죽을 먹고 살면서도 세상 만물의 바깥에 홀로 서서 초연(超然)하게 살고 싶어 하였다. 그는 더욱 매월당(梅月堂)김시습(金時習)의 삶을 흠모하여 미친 사람처럼 조선 8도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만 사람의 도리만은 독실하게 지켰으므로, 김시습처럼 남의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남들이 별로 알지 못하였으나 그는 스스로 안분지족(安分知足: 분수를 지키고 만족을 아는 것)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을 뿐이다. 그는 총명하고 영특하여 4~5세 때에 이미 문자(文字)를 깨쳤고, 8세 때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매우 슬퍼하고, 자라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한 나머지 몸이 수척하여 병이 되어 이때부터 곧잘 병을 앓았다. 그러나 글을 읽고 글을 짓는 것을 잘하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였으며, 그가 짓는 시어(詩語)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송자대전』 권179 「시직 신공익륭 묘갈명」]
1635년(인조 13) 그의 나이 34세 때에 지방에서 별시(別試)문과(文科)의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때 동인(東人) 계통의 어떤 응시생이 율곡(栗谷)이이(李珥)와 우계(牛溪)성혼(成渾)를 헐뜯고 욕하면서 과장(科場)에 모인 많은 선비들을 꾸짖고 욕하였다. 그 응시생은 신익륭을 보고 정승 신흠의 조카인 줄을 알아차리고, 더욱 심하게 배척하고 공격하였다. 신익륭은 이때부터 과거 시험을 보아 출세하려는 뜻을 접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예산(禮山)에 있고,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9 「시직 신공익륭 묘갈명(侍直申公翊隆墓碣銘)」]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부사(府使)한회일(韓會一)의 딸이고 서평(西平) 부원군한준겸(韓浚謙)의 손녀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신만(申曼)이고, 차남은 신성(申晟)으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딸은 부윤(府尹)이관(李慣)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동춘당집(同春堂集)』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우복집(愚伏集)』
- 『일사기문(逸史記聞)』
- 『홍재전서(弘齋全書)』
- 『월사집(月沙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동주집(東州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