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정(燕尾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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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동북쪽의 월곶진에 있는 정자.

개설

연미정(燕尾亭)은 강화도 월곶진(月串鎭)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의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승지이면서 군사 요충지였다. 연미정의 동쪽에 유한(留漢)이라는 섬이 있는데, 여기에서 한강물이 남쪽으로는 갑곶진(甲串鎭)으로 흘러 들어가고, 서쪽으로는 승천포(昇天浦)로 흘러 들어가는데, 두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는 모양이 마치 제비 꼬리와 같기 때문에 이름을 연미정이라고 하였다. 이런 지리적 배경 때문에 연미정은 고려시대부터 지방의 조세를 운반하던 조운선들이 정박하던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전기에는 성종대와 중종대에 왜구 및 여진 토벌에 뛰어났던 황형(黃衡)이 별장과 누정을 지으면서 개인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17세기에 병자호란을 겪은 뒤 새롭게 관방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진보(鎭堡)를 새로 설치했는데, 그때 설치한 월곶진에 소속되었다. 이후 연미정과 월곶진은 동일한 장소에 있어 이름이 혼동되기도 하였다. 연미정은 월곶진과 돈대 등의 군수 시설이 설치되고, 누정을 관리하던 황형의 후손이 사라짐으로써 퇴락하였다. 1744년(영조 20)에 이름만 있던 연미정을 당시 강화유수김시혁(金始㷜)이 다시 짓고 기문을 썼으며, 1891년(고종 28)에 재차 중건하였다.

위치 및 용도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의 수로는 삼남(三南)과 양서(兩西)의 수로를 관할하는 인후(咽喉)의 땅인 삼수교충지(三水交衝地)였다. 서해의 바다를 거쳐 강화도를 지나면 한강을 통해 도성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연미정은 강화도에 도착한 배들이 한강을 거쳐 도성으로 들어가던 길목에 있었다. 역으로 도성에서 강화도로 가는 교통로를 보면, 육로는 양천(陽川)·통진(通津)·갑곶(甲串)에 이르러 배를 이용하는 것이며, 수로는 한강을 따라 김포·양천·통진을 지나서 연미정에 이르는 길이었다(『광해군일기』 10년 7월 2일). 따라서 연미정은 도성 서쪽의 교통 요충지인 강화도의 관문이었고, 이곳을 통해 수로 유통망이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운이었다.

조선전기에 연미정에 정박하던 조운선은 충청도와 전라도 소속이었다. 조운선은 국초부터 30척이 1대의 선단으로 움직였다. 충청도 60척, 전라도 155척으로 모두 215척의 조운선이 매년 연미정에 정박하였다. 예컨대 1474년(성종 5)에 충청도와 전라도의 조운은 해운판관(海運判官)·차사원(差使員)이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와 여러 포(浦)의 만호(萬戶)들이 호송하였고, 연미정에는 조관을 보내어 경강(京江)까지 운반하게 했다(『성종실록』 5년 2월 22일). 조선후기에도 조운선과 임운선 200여 척이 도착하였다. 따라서 3~4월이면 연미정 앞에 조세 미곡을 운반하는 수십 척의 세곡선이 정박하였다. 강화부사는 연미정에 조운선들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연미정에 행차하여 조운선을 점검하러 온 호조(戶曹)의 관리들을 접대하였다. 또한 조운선의 감독과 함께 연미정 인근에서 해난사고를 당한 배들을 관리하였다. 그런데 영조대에 이르러 호조의 관리들이 충청도 태안의 안흥진에서 세곡을 점검하게 되어 연미정에서 조운선을 감독하는 것은 강화부사의 책임이 되었다.

변천 및 현황

인조대에 강화도가 병자호란의 피난처로 이용되면서 연미정은 군사적인 중요성이 높아졌다. 1627년(인조 5)에는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한 뒤 연미정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인조실록』 5년 2월 8일). 이후 연미정 인근에 보루(堡壘)를 설치하려고 했으나 강화부를 강화하는 것에 그쳤다(『인조실록』 9년 8월 3일). 연미정 인근에 보루를 설치하는 것은 효종대에도 이어졌다. 1655년(효종 6)에 강화부가 섬의 내부에 치우쳐 있어서 병자호란 시 섬이 함락되었다며 물가에 보를 설치하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이때 연미(燕尾)와 갑곶을 요충지로 정하고 변장(邊將)을 두려고 했다(『효종실록』 6년 1월 17일).

정조대에 강화도에 수군의 통어영(統禦營)을 설치한 것은 연미정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연미정이 군사적으로 거론된 이유는 삼남의 선로(船路)가 모두 강화도의 월곶진 연미정 앞바다에 이르러 경강으로 들어간다는 점 때문이었다. 월곶진 소속의 연미정에 올라가면 수로와 형승(形勝)을 두루 살필 수 있었으므로 강화도의 어느 곳보다도 요충지였다. 더욱이 연미정이 소속된 월곶진의 위치도 중요하였다. 월곶진은 삼로(三路)의 수로를 굽어보고 있고 앞에는 문수산성(文殊山城)을 마주 대하여 기각(掎角)의 형세를 띠었다. 또한 월곶진의 앞바다는 수면(水面)이 넓어서 조련장(操鍊場)으로 쓸 수 있었다(『정조실록』 3년 3월 8일). 이 밖에 연미정은 장용영의 군대가 활 쏘는 장소로 사용할 정도로 군사기지로 활용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연미정 인근에 위치한 갑곶진은 고려 고종이 원나라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하자, 원의 군사들이 자신들의 갑옷만 쌓아도 건너가 공격할 수 있는 곳이라고 비하했던 말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의 강화를 연미정에서 거행하였는데, 당시 후금의 유해(劉海)가 연미정에서 양국이 형제국임을 맹세하는 서약을 하였다(『인조실록』 5년 2월 15일). 또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의 군대는 연미정 인근의 갑곶을 통해 강화도로 침입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덕진, 「三南 稅穀의 운송과 江華 燕尾亭의 풍경」, 『인천학연구』7, 2007.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송기중, 「17세기 수군방어체제의 개편」, 『조선시대사학보』53, 2010.
  • 이민웅, 「18세기 江華島 守備體制의 强化」, 『한국사론』34,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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