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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해에 정언신은 두만강 하류에 있는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보충하게 하였다. 녹둔도는 섬 둘레가 2리(里) 정도인데,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자, 그 건너편에 살던 우디캐[兀狄哈]족이 수확시기에 자주 녹둔도에 잠입해 들어와서 수확한 곡식을 약탈해 갔다. 그러므로 섬 안에 토성(土城)을 쌓고 [[목책(木柵)]]을 둘러쳤으며, 가까운 경흥진(慶興鎭)의 [[조산보(造山堡)]]에서 병사가 녹둔도를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에 오가면서 농사를 지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16년 12월 1일] 이어 1585년(선조 18)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선조 18년 4월 17일, 선조 20년 10월 4일] 1588년(선조 21) 우찬성(右贊成)으로 특별히 발탁되었고, 이듬해인 1589년(선조 22)에는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되었다.[『선조실록』선조 21년 2월 19일, 선조 22년 2월 1일] | 그리고 이 해에 정언신은 두만강 하류에 있는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보충하게 하였다. 녹둔도는 섬 둘레가 2리(里) 정도인데,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자, 그 건너편에 살던 우디캐[兀狄哈]족이 수확시기에 자주 녹둔도에 잠입해 들어와서 수확한 곡식을 약탈해 갔다. 그러므로 섬 안에 토성(土城)을 쌓고 [[목책(木柵)]]을 둘러쳤으며, 가까운 경흥진(慶興鎭)의 [[조산보(造山堡)]]에서 병사가 녹둔도를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에 오가면서 농사를 지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16년 12월 1일] 이어 1585년(선조 18)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선조 18년 4월 17일, 선조 20년 10월 4일] 1588년(선조 21) 우찬성(右贊成)으로 특별히 발탁되었고, 이듬해인 1589년(선조 22)에는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되었다.[『선조실록』선조 21년 2월 19일, 선조 22년 2월 1일] | ||
− | 이때 그는 정여립 모반 사건을 다스리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다. 정언신은 정여립과 9촌의 친족 관계였는데, 이를 두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가 정여립과 친족으로서 친하다며 탄핵하였으므로, 그는 위관뿐만 우의정도 사퇴하였다.[『선조실록』선조 22년 11월 7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1월 1일] 대신 서인(西人)인 좌의정정철(鄭澈)이 위관에 임명되었는데, 정철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확대시켜 결국 <기축옥사(己丑獄死)>를 일으켰다.[「정언신신도비명」] 이 사건으로 이발( | + | 이때 그는 정여립 모반 사건을 다스리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다. 정언신은 정여립과 9촌의 친족 관계였는데, 이를 두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가 정여립과 친족으로서 친하다며 탄핵하였으므로, 그는 위관뿐만 우의정도 사퇴하였다.[『선조실록』선조 22년 11월 7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1월 1일] 대신 서인(西人)인 좌의정정철(鄭澈)이 위관에 임명되었는데, 정철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확대시켜 결국 <기축옥사(己丑獄死)>를 일으켰다.[「정언신신도비명」] 이 사건으로 이발(李潑)과 최영경(崔永慶) 등 동인(東人) 1천 명이 심문당하고 처형되었다. |
한편 당시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된 죄인들의 공초(供招)에서 정언신의 이름이 등장하였으므로, 결국 정언신도 친국(親鞫)을 받았다.[『선조실록』선조 22년 11월 12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1월 1일] 이때 그의 둘째 아들인 승문원 정자정률(鄭慄)이 아버지 정언신에게 정여립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서찰 가운데에 정언신의 이름이 들어 있었으므로,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었던 그는 죄를 인정하고 말았다.[『선조실록』선조 22년 11월 25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1월 1일] 이에 선조는 정언신을 사사(賜死)하도록 하였는데, 정철이 반역을 제외하고는 대신을 죽인 적이 없다며 적극 반대하여 유배로 형이 낮춰졌다.[『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2월 1일] 이후 정언신이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자 정언신의 둘째 아들 정률은 자기의 잘못을 자책하고 음식을 먹지 않다가 마침내 피를 토하고 죽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2월 1일] 맏아들 정협(鄭協)이 아버지를 따라가서 뒷수발을 하였는데, 정언신은 풍토병을 얻어 고생을 하다가 1591년(선조 24) 10월 1일 유배지인 갑산에서 세상을 떠났다.[『선조실록』선조 24년 10월 1일] 당시 향년 65세였다. | 한편 당시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된 죄인들의 공초(供招)에서 정언신의 이름이 등장하였으므로, 결국 정언신도 친국(親鞫)을 받았다.[『선조실록』선조 22년 11월 12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1월 1일] 이때 그의 둘째 아들인 승문원 정자정률(鄭慄)이 아버지 정언신에게 정여립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서찰 가운데에 정언신의 이름이 들어 있었으므로,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었던 그는 죄를 인정하고 말았다.[『선조실록』선조 22년 11월 25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1월 1일] 이에 선조는 정언신을 사사(賜死)하도록 하였는데, 정철이 반역을 제외하고는 대신을 죽인 적이 없다며 적극 반대하여 유배로 형이 낮춰졌다.[『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2월 1일] 이후 정언신이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자 정언신의 둘째 아들 정률은 자기의 잘못을 자책하고 음식을 먹지 않다가 마침내 피를 토하고 죽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2월 1일] 맏아들 정협(鄭協)이 아버지를 따라가서 뒷수발을 하였는데, 정언신은 풍토병을 얻어 고생을 하다가 1591년(선조 24) 10월 1일 유배지인 갑산에서 세상을 떠났다.[『선조실록』선조 24년 10월 1일] 당시 향년 65세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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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탕개의 난'''== | =='''니탕개의 난'''== | ||
− | 1583년(선조 16) 1월 함경도의 번호 니탕개가 중심이 되어 회령(會寧) 지방의 여진족이 일으킨 니탕개의 난이 일어났다. 니탕개는 선조 초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니마거(尼麻車) 우디캐족으로, 육진(六鎭) 지역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厚待)를 받아 온 자였다. 그런데 이때에 경원(慶源)에 사는 [[여진(女眞)]]들의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경원부사(慶源府使)김수( | + | 1583년(선조 16) 1월 함경도의 번호 니탕개가 중심이 되어 회령(會寧) 지방의 여진족이 일으킨 니탕개의 난이 일어났다. 니탕개는 선조 초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니마거(尼麻車) 우디캐족으로, 육진(六鎭) 지역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厚待)를 받아 온 자였다. 그런데 이때에 경원(慶源)에 사는 [[여진(女眞)]]들의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경원부사(慶源府使)김수(金璲)가 그들에게 패하여 사망하자, 오랑캐 군사들이 경원부의 관할 하에 있는 모든 진과 보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떨쳤다.[『청음집(淸陰集)』 권14] |
그러자 선조는 정언신을 우참찬 겸 함경도도순찰사로 임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6년 윤2월 1일, 「정언신신도비명」] 이무렵 경원부의 관할 하에 있는 진과 보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떨치던 번호들은 계속해서 경원(慶源)과 아산(阿山), 안원(安原) 등의 진보(鎭堡)를 함락시키고, 종성(鍾城)을 포위하였다. 이때 정언신은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에 따라 현지의 수령관들을 중군・좌군・우군의 3군 편제로 짜서 지형을 이용하여 오랑캐를 방어하고, 또 공격하였다. 이런 가운데 북병사(北兵使) 변국간(卞國幹)이 여러 차례 오랑캐와 전투 끝에 후퇴하게 되자, 온성부사(穩城府使)신립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랑캐들을 퇴각시켰다. 얼마 후에 니탕개 및 주도자들을 생포하여 국경 위에서 참수시키면서, 니탕개의 난은 진압되었다.[『난중잡록(亂中雜錄)』 권1] | 그러자 선조는 정언신을 우참찬 겸 함경도도순찰사로 임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6년 윤2월 1일, 「정언신신도비명」] 이무렵 경원부의 관할 하에 있는 진과 보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떨치던 번호들은 계속해서 경원(慶源)과 아산(阿山), 안원(安原) 등의 진보(鎭堡)를 함락시키고, 종성(鍾城)을 포위하였다. 이때 정언신은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에 따라 현지의 수령관들을 중군・좌군・우군의 3군 편제로 짜서 지형을 이용하여 오랑캐를 방어하고, 또 공격하였다. 이런 가운데 북병사(北兵使) 변국간(卞國幹)이 여러 차례 오랑캐와 전투 끝에 후퇴하게 되자, 온성부사(穩城府使)신립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랑캐들을 퇴각시켰다. 얼마 후에 니탕개 및 주도자들을 생포하여 국경 위에서 참수시키면서, 니탕개의 난은 진압되었다.[『난중잡록(亂中雜錄)』 권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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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탄집(秋灘集)』 | *『추탄집(秋灘集)』 | ||
*『창석집(蒼石集)』 | *『창석집(蒼石集)』 | ||
− | *『이충무공전서( | +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한음문고(漢陰文稿)』 | *『한음문고(漢陰文稿)』 | ||
*『우복집(愚伏集)』 | *『우복집(愚伏集)』 |
2018년 1월 9일 (화) 22:5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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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언신 |
한글표제 | 정언신 |
한자표제 | 鄭彦信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선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입부(立夫) |
호 | 나암(懶庵)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27년(중종 22) |
사망 | 1591년(선조 24) 10월 1일 |
본관 | 동래(東萊)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황해도 장단(長湍) |
증조부 | 정걸(鄭傑) |
조부 | 정홍손(鄭洪孫) |
부 | 정진(鄭振) |
모_외조 | 양천 허씨(陽川許氏) : 허확(許確)의 딸 |
형제 | (형)정언지(鄭彦智) |
처_장인 | 평산 신씨(平山申氏) : 사직(司直) 신예(申禮)의 딸 →(자녀)2남 |
자녀 | (1자)정협(鄭協) (2자)정률(鄭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언신(鄭彦信) |
총론
[1527년(중종 22)∼1591년(선조 24) = 65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과 우의정(右議政)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입부(立夫)이고, 호는 나암(懶菴)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정진(鄭振)이고, 어머니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부윤(府尹)허확(許確)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홍손(鄭洪孫)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병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정걸(鄭傑)이다. 이조 참판(參判)정언지(鄭彦智)의 동생이며, 이조 판서를 지낸 정세규(鄭世規)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갑산(甲山)으로 유배된 후 세상을 떠났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66년(명종 21)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0세였다.[『방목(榜目)』]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용주유고(龍洲遺稿)』 권21 「우의정나암정공신도비명(右議政懶庵鄭公神道碑銘)」 이하 「정언신신도비명」으로 약칭]
1568년(선조 1)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기 위하여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였는데, 그는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에 선발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1년 8월 12일 ] 1571년(선조 4)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를 거쳐서,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선조 4년 8월 22일, 선조 4년 10월 29일] 그러나 1572년(선조 5)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아 체차되어,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전임되었다.[『선조실록』선조 5년 9월 22일, 선조 5년 12월 13일] 1574년(선조 7)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되었으며, 1575년(선조 8)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인 1576년(선조 9)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선조 7년 6월 13일, 선조 8년 12월 22일, 선조 9년 10월 2일] 1578년(선조 11)에는 허봉(許篈) 및 정이주(鄭以周) 등과 함께 순무어사(巡撫御史)에 임명되어, 양계(兩界)와 하삼도(下三道) 지방을 순찰하였다.[『선조실록』선조 11년 2월 28일]
그리고 1579년(선조 12)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직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16년 2월 1일, 「정언신신도비명」] 1582년(선조 16) 함경도 두만강 유역 5진(鎭)의 번호(藩胡 : 조선에 복속한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니탕개의 난>을 일으켜서 국경을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선조는 정언신(鄭彦信)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시키고 함경도도순찰사(咸鏡道都巡察使)를 겸임하게 하여, 오랑캐를 정벌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선조 16년 2월 7일, 선조 16년 2월 15일] 그가 출정할 때 그 막하에는 이순신(李舜臣)을 비롯하여 신립(申砬)과 김시민(金時敏), 이억기(李億祺) 등의 젊고 뛰어난 무장들이 종군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나라를 구원한 명장이 되었다. 정언신이 오랑캐를 정벌하고 개선하자, 선조는 그를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임명하여 북방의 방어를 맡겼다.[『선조실록』선조 16년 4월 18일]
그리고 이 해에 정언신은 두만강 하류에 있는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보충하게 하였다. 녹둔도는 섬 둘레가 2리(里) 정도인데,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자, 그 건너편에 살던 우디캐[兀狄哈]족이 수확시기에 자주 녹둔도에 잠입해 들어와서 수확한 곡식을 약탈해 갔다. 그러므로 섬 안에 토성(土城)을 쌓고 목책(木柵)을 둘러쳤으며, 가까운 경흥진(慶興鎭)의 조산보(造山堡)에서 병사가 녹둔도를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에 오가면서 농사를 지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16년 12월 1일] 이어 1585년(선조 18)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선조 18년 4월 17일, 선조 20년 10월 4일] 1588년(선조 21) 우찬성(右贊成)으로 특별히 발탁되었고, 이듬해인 1589년(선조 22)에는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되었다.[『선조실록』선조 21년 2월 19일, 선조 22년 2월 1일]
이때 그는 정여립 모반 사건을 다스리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다. 정언신은 정여립과 9촌의 친족 관계였는데, 이를 두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가 정여립과 친족으로서 친하다며 탄핵하였으므로, 그는 위관뿐만 우의정도 사퇴하였다.[『선조실록』선조 22년 11월 7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1월 1일] 대신 서인(西人)인 좌의정정철(鄭澈)이 위관에 임명되었는데, 정철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확대시켜 결국 <기축옥사(己丑獄死)>를 일으켰다.[「정언신신도비명」] 이 사건으로 이발(李潑)과 최영경(崔永慶) 등 동인(東人) 1천 명이 심문당하고 처형되었다.
한편 당시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된 죄인들의 공초(供招)에서 정언신의 이름이 등장하였으므로, 결국 정언신도 친국(親鞫)을 받았다.[『선조실록』선조 22년 11월 12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1월 1일] 이때 그의 둘째 아들인 승문원 정자정률(鄭慄)이 아버지 정언신에게 정여립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서찰 가운데에 정언신의 이름이 들어 있었으므로,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었던 그는 죄를 인정하고 말았다.[『선조실록』선조 22년 11월 25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1월 1일] 이에 선조는 정언신을 사사(賜死)하도록 하였는데, 정철이 반역을 제외하고는 대신을 죽인 적이 없다며 적극 반대하여 유배로 형이 낮춰졌다.[『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2월 1일] 이후 정언신이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자 정언신의 둘째 아들 정률은 자기의 잘못을 자책하고 음식을 먹지 않다가 마침내 피를 토하고 죽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 12월 1일] 맏아들 정협(鄭協)이 아버지를 따라가서 뒷수발을 하였는데, 정언신은 풍토병을 얻어 고생을 하다가 1591년(선조 24) 10월 1일 유배지인 갑산에서 세상을 떠났다.[『선조실록』선조 24년 10월 1일] 당시 향년 65세였다.
한편 1606년(선조 39) 신잡(申磼)이 정언신의 서찰은 모두 글에 능한 둘째 아들 정율이 쓴 것이라며, 이후 정율이 근심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한 당시 함께 파직된 후 귀양을 갔다가 임진왜란 때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된 정언지(鄭彦智)를 예로 들며 정언신의 신원을 요청하였다.[『선조실록』선조 39년 9월 10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4년 10월 1일] 이에 정언신은 직첩(職牒)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선조실록』선조 39년 9월 10일]
니탕개의 난
1583년(선조 16) 1월 함경도의 번호 니탕개가 중심이 되어 회령(會寧) 지방의 여진족이 일으킨 니탕개의 난이 일어났다. 니탕개는 선조 초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니마거(尼麻車) 우디캐족으로, 육진(六鎭) 지역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厚待)를 받아 온 자였다. 그런데 이때에 경원(慶源)에 사는 여진(女眞)들의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경원부사(慶源府使)김수(金璲)가 그들에게 패하여 사망하자, 오랑캐 군사들이 경원부의 관할 하에 있는 모든 진과 보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떨쳤다.[『청음집(淸陰集)』 권14]
그러자 선조는 정언신을 우참찬 겸 함경도도순찰사로 임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6년 윤2월 1일, 「정언신신도비명」] 이무렵 경원부의 관할 하에 있는 진과 보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떨치던 번호들은 계속해서 경원(慶源)과 아산(阿山), 안원(安原) 등의 진보(鎭堡)를 함락시키고, 종성(鍾城)을 포위하였다. 이때 정언신은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에 따라 현지의 수령관들을 중군・좌군・우군의 3군 편제로 짜서 지형을 이용하여 오랑캐를 방어하고, 또 공격하였다. 이런 가운데 북병사(北兵使) 변국간(卞國幹)이 여러 차례 오랑캐와 전투 끝에 후퇴하게 되자, 온성부사(穩城府使)신립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랑캐들을 퇴각시켰다. 얼마 후에 니탕개 및 주도자들을 생포하여 국경 위에서 참수시키면서, 니탕개의 난은 진압되었다.[『난중잡록(亂中雜錄)』 권1]
성품과 일화
정언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와 골격이 빼어나고 시원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피부가 희고 키가 컸으며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수염이 신선과 같이 위엄이 있어서 무리에서 뛰어났다. 15세가 되기 전에 아버지 상을 당하였으므로 스승에게 공부할 겨를이 없었으나, 조금 성장한 이후에 스스로 과정을 정해놓고 쉬지 않고 글을 읽었다. 집에 있을 때는 검소한 것을 좋아하여, 의복과 거마(車馬)와 차린 음식이 모두 소박하고 담백하였으며, 부인의 예복(禮服)을 지을 때에도 겨우 올이 가는 삼베를 사용하게 하였다. 그가 아침저녁으로 나랏일을 보느라 가계를 돌보지 않아 재산을 조금도 불리지 않았으므로,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데에 부인의 내조가 많았다.[「정언신신도비명」]
그의 장남 정협은 1590년(선조 23) 귀양 가는 아버지를 따라서 함경도 갑산에 가서 뒷수발을 하였다. 당시 풍토병을 앓던 정언신은, 중앙 정부에서 정철이 선조의 배척을 받아 평안도 강계(江界)로 귀양 갔다는 말을 듣고, 아들 정협을 시켜 강계로 가서 정철에게 문안을 드리고 전날 자기를 온전히 살려준 은혜에 대하여 사례하게 하였다. 아들 정협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갑산과 영변을 왕래하면서 정철을 찾아가서 사례하였다. 동인의 어떤 친구가 정협에게 정철을 찾아간 것을 매우 나무라니, 정협이 변명하기를, “부친의 뜻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나의 뜻이 아니었다.” 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23년 6월 1일] 그리하여 1624년(인조 2) 5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집권한 서인들이 정철의 관작을 회복할 것을 논의할 때 그는 동인의 입장에서 정철을 공박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2년 5월 29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금양(衿陽 : 시흥)에 있었으나, 1596년(선조 28)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하였다가, 1607년(선조 40) 황해도 장단(長湍)으로 이장하였다.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정언신신도비명」]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부인 평산 신씨는 사직(司直)신예(申禮)의 딸이다. 자녀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정협은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차남 정율은 승문원 정자로 있다가 아버지 정언신이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유배될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용주유고(龍洲遺稿)』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곡집(谿谷集)』
- 『계미기사(癸未記事)』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축록속(己丑錄續)』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담헌서(湛軒書)』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묵재일기(黙齋日記)』
- 『문소만록(聞韶漫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부계기문(涪溪記聞)』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順菴集)』
- 『시정비(時政非)』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아계유고(鵝溪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 『우계집(牛溪集)』
- 『운암잡록(雲巖雜錄)』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부훤당유고(負暄堂遺稿)』
- 『구암집(龜巖集)』
- 『미암집(眉巖集)』
- 『소재집(穌齋集)』
- 『초당집(草堂集)』
- 『옥계집(玉溪集)』
- 『동원집(東園集)』
- 『송천유집(松川遺集)』
- 『약포집(藥圃集)』
- 『초간집(草澗集)』
- 『우계집(牛溪集)』
- 『내암집(來庵集)』
- 『송강집(松江集)』
- 『월정집(月汀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서애집(西厓集)』
- 『중봉집(重峰集)』
- 『일송집(一松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태천집(苔泉集)』
- 『추탄집(秋灘集)』
- 『창석집(蒼石集)』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한음문고(漢陰文稿)』
- 『우복집(愚伏集)』
- 『월사집(月沙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노서유고(魯西遺稿)』
- 『문곡집(文谷集)』
- 『서계집(西溪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남계집(南溪集)』
- 『장암집(丈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