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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총론'''== | ||
− | [1520(중종15)∼1549(명종4) = 30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 활동한 학자. 자는 원숙(元叔), 호는 주천(舟川)이다. 본관은 신천(信川)인데, 파조는 강한룡(康漢龍)이다.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강중진(康仲珍)]]의 손자이고,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강복성(康復誠)]]의 아버지다. 유학자 탄수(灘叟)이연경( | + | [1520(중종15)∼1549(명종4) = 30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 활동한 학자. 자는 원숙(元叔), 호는 주천(舟川)이다. 본관은 신천(信川)인데, 파조는 강한룡(康漢龍)이다.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강중진(康仲珍)]]의 손자이고,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강복성(康復誠)]]의 아버지다. 유학자 탄수(灘叟)이연경(李延慶)의 문하생이며, 그 사위이다. |
− | [중종~명종 시대의 활동] 1537년(중종32) 나이 18세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1538년 나이 19세 때 유학자 이연경( | + | [중종~명종 시대의 활동] 1537년(중종32) 나이 18세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1538년 나이 19세 때 유학자 이연경(李延慶)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연경은 그 인물을 높이 평가하여 사위로 맞아들여 학문을 폭넓게 가르쳤고, 과거 공부만을 전적으로 일삼지 못하게 하였다. |
1544년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그는 성균관 유생(儒生)들을 선동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억울하게 죽은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 등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기를 소청(疏請)하였다. 마침내 인종은 그들을 신원(伸寃)해 줄 것을 허락하였다. 당시 인종에게 세 차례나 상소한 [[태학생(太學生)]]의 글은 모두 그가 쓴 글이었다. 이로 인하여 실권자의 미움을 받아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다음해 인종이 승하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경상도 선산(善山)으로 내려가서 산수를 벗하며 살고자 하였다. | 1544년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그는 성균관 유생(儒生)들을 선동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억울하게 죽은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 등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기를 소청(疏請)하였다. 마침내 인종은 그들을 신원(伸寃)해 줄 것을 허락하였다. 당시 인종에게 세 차례나 상소한 [[태학생(太學生)]]의 글은 모두 그가 쓴 글이었다. 이로 인하여 실권자의 미움을 받아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다음해 인종이 승하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경상도 선산(善山)으로 내려가서 산수를 벗하며 살고자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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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남이 고발한 동생 이홍윤의 역모 사건에 연루'''== | =='''이홍남이 고발한 동생 이홍윤의 역모 사건에 연루'''== | ||
− | 1549년(명종4) 이홍남( | + | 1549년(명종4) 이홍남(李洪南)이 유배소에 있으면서 그 아우 이홍윤(李洪胤)이 작당(作黨)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충청도 중원(中原: 충주와 청주) 유생들이 많이 연루되어 30여 명 이상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모두 죽었다. 그때 이홍윤(李洪胤)이 자복하면서, “강유선이 격서(檄書)를 썼을 뿐만 아니라, 주장(主將)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고 무고하였다. 그는 지극히 참혹한 형신(刑訊)을 5, 6차례 받았으나 끝까지 버티고 자복하지 않았다. 곤장을 맞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을 때, “해가 하늘에 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니, 추국하던 관원들이 놀라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마침내 글로써 형제들에게 고별하기를, “평생 충효를 내세웠었는데 도리어 불충(不忠)이란 이름을 뒤집어쓰고 죽으니, 황천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죽을 때 나이가 겨우 30세였다. |
− | 기묘사화 때 이홍윤( | + | 기묘사화 때 이홍윤(李洪胤)의 아버지를 죽인 정언각(鄭彦慤)과 장인을 죽인 이기(李芑)는 모두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小尹)]] 일파였다. 이에 충청도 유생(儒生)들이 주동하여, 충청도 충주·음성 고을의 병력으로 윤원형 일파를 모조리 제거하고, 이어서 명종도 죽인 다음에 이홍윤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거사를 꾸몄다. 그러나 유배지에 있던 그 형 이홍남의 고발에 의하여 거사는 실패하였다. 그 일당 30여 명은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집안의 자제(子弟)들이 많았다. 실록에 의하면, 이홍윤(李洪胤)의 역모 사건은 유생들이 [[박원종(朴元宗)]]의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모방하여, 기묘사화의 반전(反轉)을 노렸던 사건이었다고 한다. |
강유선의 저서로는 『주천유고(舟川遺稿)』 1권이 있다. | 강유선의 저서로는 『주천유고(舟川遺稿)』 1권이 있다. |
2018년 1월 9일 (화) 22:4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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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강유선 |
한글표제 | 강유선 |
한자표제 | 康惟善 |
분야 | 교육·언론인/유생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종~명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원숙(元叔) |
호 | 주천(舟川)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20년(중종15) |
사망 | 1549년(명종4) |
본관 | 신천(信川) |
주거지 | 선산(善山) |
묘소소재지 | 경상도 선산(善山) 개령(開寧) 동리(東里)의 선영(先塋) |
증조부 | 강척(康惕) |
조부 | 강중진(康仲珍) |
부 | 강의(康顗) |
모_외조 |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사걸(鄭士傑)의 딸 |
처_장인 |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연경(李延慶)의 딸→(자녀)1남 1녀 |
자녀 | (1자)강복성(康復誠) (1녀)이용중(李用中)의 처 |
저술문집 | 『주천유고(舟川遺稿)』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강유선(康惟善) |
총론
[1520(중종15)∼1549(명종4) = 30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 활동한 학자. 자는 원숙(元叔), 호는 주천(舟川)이다. 본관은 신천(信川)인데, 파조는 강한룡(康漢龍)이다.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강중진(康仲珍)의 손자이고,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강복성(康復誠)의 아버지다. 유학자 탄수(灘叟)이연경(李延慶)의 문하생이며, 그 사위이다.
[중종~명종 시대의 활동] 1537년(중종32) 나이 18세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1538년 나이 19세 때 유학자 이연경(李延慶)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연경은 그 인물을 높이 평가하여 사위로 맞아들여 학문을 폭넓게 가르쳤고, 과거 공부만을 전적으로 일삼지 못하게 하였다.
1544년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그는 성균관 유생(儒生)들을 선동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억울하게 죽은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 등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기를 소청(疏請)하였다. 마침내 인종은 그들을 신원(伸寃)해 줄 것을 허락하였다. 당시 인종에게 세 차례나 상소한 태학생(太學生)의 글은 모두 그가 쓴 글이었다. 이로 인하여 실권자의 미움을 받아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다음해 인종이 승하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경상도 선산(善山)으로 내려가서 산수를 벗하며 살고자 하였다.
이홍남이 고발한 동생 이홍윤의 역모 사건에 연루
1549년(명종4) 이홍남(李洪南)이 유배소에 있으면서 그 아우 이홍윤(李洪胤)이 작당(作黨)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충청도 중원(中原: 충주와 청주) 유생들이 많이 연루되어 30여 명 이상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모두 죽었다. 그때 이홍윤(李洪胤)이 자복하면서, “강유선이 격서(檄書)를 썼을 뿐만 아니라, 주장(主將)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고 무고하였다. 그는 지극히 참혹한 형신(刑訊)을 5, 6차례 받았으나 끝까지 버티고 자복하지 않았다. 곤장을 맞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을 때, “해가 하늘에 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니, 추국하던 관원들이 놀라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마침내 글로써 형제들에게 고별하기를, “평생 충효를 내세웠었는데 도리어 불충(不忠)이란 이름을 뒤집어쓰고 죽으니, 황천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죽을 때 나이가 겨우 30세였다.
기묘사화 때 이홍윤(李洪胤)의 아버지를 죽인 정언각(鄭彦慤)과 장인을 죽인 이기(李芑)는 모두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小尹) 일파였다. 이에 충청도 유생(儒生)들이 주동하여, 충청도 충주·음성 고을의 병력으로 윤원형 일파를 모조리 제거하고, 이어서 명종도 죽인 다음에 이홍윤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거사를 꾸몄다. 그러나 유배지에 있던 그 형 이홍남의 고발에 의하여 거사는 실패하였다. 그 일당 30여 명은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집안의 자제(子弟)들이 많았다. 실록에 의하면, 이홍윤(李洪胤)의 역모 사건은 유생들이 박원종(朴元宗)의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모방하여, 기묘사화의 반전(反轉)을 노렸던 사건이었다고 한다.
강유선의 저서로는 『주천유고(舟川遺稿)』 1권이 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하여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였고,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군자(君子)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그를 꺼리고 싫어하는 자도 많았다. 고훈(古訓)을 좋아하여 하루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고, 충신 의사(義士)로서 죽을 데 죽지 못한 경우에 목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책을 덮고 일어섰다. 글을 지을 때에는 기발한 표현에 힘을 써서 청신하고 뛰어났으나 세속적인 운치가 없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선산(善山) 개령(開寧) 동리(東里)에 있는데, 강백년(姜栢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주천유고(舟川遺稿)』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정암집(靜菴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잠곡유고(潛谷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