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학생(太學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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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균관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던 유생들의 별칭.

개설

태학생은 성균관 유생의 다른 명칭으로써 주로 장의(掌議) 이하 생원·진사와 그 외의 유생을 통칭하는 말이다.

내용 및 특징

태학생은 태학의 유생이란 뜻이다. 고려는 성종대에 중국 당·송의 학제를 계승하여 국립대학으로 국자감을 두고 그 안에 다시 국자학, 태학, 사문학을 둔 후 부조(父祖)의 관품에 따라 차별을 두고 입학시킨 후 교육하였다. 한편 중국의 수와 북송에서는 일시적이기는 하나 태학을 설치하고 나라의 교육을 총관하게 하였고, 우리나라의 고구려에도 국립대학으로 태학을 두었다. 이를 볼 때 태학생은 고려 국자감에 설치된 태학의 학생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겠으나, 고려의 태학은 국자감에 소속된 학교이지 국자감을 대표하는 학교가 아니었다. 반면에 중국의 수·북송과 고구려의 태학은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립대학이었다. 또 조선의 성균관은 고려 초 국자감 때와는 달리 입학을 달리하는 태학 등이 설치되지 않고 소과에 급제한 생원·진사와 승보시를 통과한 사학생들이 입학하여 학습하였다. 따라서 성균관 유생은 엄밀히는 태학생과 무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국학생의 별칭으로 불린 태학생이 답습되면서 성균관 유생의 별칭으로 정착되고 조선 일대로 계승되면서 통용되었다. 이 점에서 국자감이나 성균관 학생을 의미하는 태학생은 고려의 태학보다는 중국의 수·북송과 고구려의 태학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태학생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불리는 기숙사에 기거하며 공부하였다. 기숙사에 있지 못하고 성균관 밖 반촌(泮村)에서 하숙하는 유생들은 방외유생(方外儒生)이라고 부른다. 동재와 서재에 있는 방의 수는 각각 14개이다. 그중 12개의 방을 상재(上齋) 또는 상사(上舍)라고 한다. 여기에는 생원과 진사만 들어갈 수 있었다.

동·서재에 각각 두 개씩 남아 있는 방은 아직 생원과 진사의 학위를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거처라는 뜻에서 하재(下齋)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문벌이 좋은 유학(幼學)과 사부학당의 학생 중에서 공부를 잘해 올라온 사람들이 기거할 수 있었다. 이들을 하재생(下齋生) 또는 기재생(寄齋生)이라 부른다. 기재생의 수효가 20명이라고 하므로 방 하나에 기숙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5명이었던 셈이다.

공부하는 것 외에 태학생들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는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를 지키고, 석전(釋奠) 또는 석채(釋菜)라 불리는 제사에서 봉향(奉香)하는 등 여러 집사(執事)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변천

태학생들이 한 일 중 언급할 만한 것으로 책을 교열하거나 베껴 써서 왕에게 올리는 것이 있었다. 경서 중에 존경각(尊經閣) 판본으로 가장 좋은 것은 모두 태학생들이 쓴 것이라고 한다. 이이(李珥)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영락대전본(永樂大全本)을 가지고 구두점을 찍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은 정조 재위 때에 가장 활발했던 것 같다. 이때에 많은 태학생들이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 『강목강의(綱目講義)』 등의 필사에 종사하였다[『정조실록』 15년 5월 3일].

참고문헌

  • 『반중잡영(泮中雜詠)』
  • 『태학지(太學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汪鍾霖 編撰, 『九通分類總纂』, 藝文印書館,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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