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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지역 사회에서 향안에 입록시키거나, 부역·과세를 할 때에 이를 조정하는 등 다양한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향권(鄕權)은 조선시대의 지역 사회, 즉 향촌 사회에서 갖는 다양한 의사 결정 권한을 말한다. 향권에는 부역(負役)이나 조세의 분배권, 향촌 사회의 의사 결정 기구인 향청의 모집단(母集團)인 향안(鄕案) 조직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 즉 향적권(鄕籍權), 좌수(座首)와 별감 등 향임(鄕任)에 선임되거나 추천할 수 있는 권한, 즉 향천권(鄕薦權) 등이 있다. 이러한 향권을 둘러싸고 개인 또는 집단 간에 다투는 것을 향전(鄕戰)이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731년(영조 7) 충청도 면천(沔川)에서 "수령이 향임과 향족(鄕族)을 비호하고 유림(儒林)을 저해한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올라왔다. 그러자 영조는 이것을 향전으로 지목해 상소를 올린 유생 대표[疏頭]를 유배시켰다. 이 사실은 많은 시사를 제공한다.

숙종대 이후 중앙 정계가 경색되고 지방 세력의 중앙 진출이 크게 억제되는 가운데 지방 세력을 배경으로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켜 중앙 정계의 재편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를 계기로 지방 세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지역 사회의 향권을 둘러싼 논의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1651년(효종 2) 금산(錦山) 지역에 사는 박취문(朴就文)은 전 좌랑이유태(李惟泰)가 금산의 향권을 장악하여 남의 전답을 빼앗는 등의 악행을 일삼는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유학(幼學)안적(安績) 등은 박취문의 상소가 모함이라는 상소를 올렸다(『효종실록』 2년 4월 17일).

1653년에는 사헌부에서 헌납(獻納)이기발(李起渤)을 고발하였는데, 사헌부의 주장에 의하면 이기발이 향촌에 거주하면서 처신이 간사하여 송사를 처리하는 송정(訟庭)에 출입하면서 향권을 마음대로 했다고 하였다. 또한 관부(官府)의 정령(政令)에도 간여하였으며 집에서도 가혹한 형벌을 해서 임신한 비첩(婢妾)을 죽였다고 하였다(『효종실록』 4년 5월 3일). 이는 중앙 관직에 있는 관인 신분의 사람이 지방에서의 향권에 관여하는 것은 비리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외에도 향권이라는 용어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향권을 둘러싸고 신구 세력이 갈등을 일으키다가 중앙에까지 싸움이 번져 알려지게 되는 경우이다. 안동에서는 김상헌의 서원 건립을 둘러싸고 향전이 벌어졌는데, 이는 새로 등장한 세력이 향권을 장악하려고 중앙의 권력자에 의존하다 일어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영조실록』 14년 5월 18일). 영조대에는 무신란을 겪은 이후 안동의 향권을 기존 세력에게만 줄 것이 아니고 새로운 세력과 나누어 지역 사회의 반정부적 태도를 견제해야 한다는 중앙의 공론이 형성되었다(『영조실록』 18년 9월 24일).

변천

향권은 경재소(京在所)가 유향소의 좌수와 별감을 임명하던 조선전기에는 국가 권력을 대리하던 수령을 어느 정도는 견제할 정도의 지방 자치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603년 경재소가 혁파된 이후에는 좌수와 별감 등 향임을 수령이 임명하고, 1654년 「영장사목(營將事目)」이 반포된 이후에는 좌수와 별감 등 향임이 수령의 수하 기구로 전락하자 기존 양반층에서는 향임을 회피하게 되었다. 이에 향임을 맡아 향권을 장악하려는 향족(鄕族)이 나타나게 되어 사족이 유족(儒族)과 향족으로 분화되는 유향분기(儒鄕分岐)가 일어났다. 유족은 향교나 서원, 향약 기구를 중심으로 향권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향족은 수령의 보조 기구로 전락한 향청의 임원인 좌수, 별감 즉 향임을 맡아서 향권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향권을 둘러싸고 기존 지배층과 새로 등장하는 세력 간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이를 향전이라고 하였다. 향전이 공식적인 연대기에서 집중적으로 문제되었던 것은 영조·정조 연간이었다. 이는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질서가 붕괴되고 관 주도의 통제책이 강화되던 당시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시기 향전이 수령권[官權]과 연계되어 전개되었던 것이 그 점을 말해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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