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장지구(婚葬之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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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나 장례 때 사용하던 각종 기구와 용구.

개설

혼장지구(婚葬之具)에 대해서는 사치로 인한 폐해와 비용 부담에 따른 의례 수행의 차질이라는 내용이 주로 쟁점이 되었다. 1479년(성종 10) 5월 12일에 왕과 신하들이 나눈 대화 내용에서 이러한 점들이 드러난다. 성종은 상장구(喪葬具)는 그 집안 살림 형편에 따라 알맞게 해야 하는데, 세속에서는 후장(厚葬)하는 자들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우승지이경동(李瓊仝)은 경성에서 가까운 곳에서는 후장하는 자가 드물지만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모든 혼례와 장례의 용구를 남보다 사치하기를 힘써서 가산(家産)을 허비하고 제도를 지키지 않은 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전경안윤손(安潤孫)은 서울에 사는 백성 중에 어버이를 위하여 재승(齋僧)을 하고 화려함을 숭상하여 산업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송종(送終)함에 이르러서는 또 관(棺)이 있는데 곽(槨)이 없는 자가 없으니 법을 세워서 이를 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재승이란 절에서 재를 올리고 중에게 밥을 먹이는 일을 말한다. 혼가(婚嫁)에 대해서도 금법(禁法)을 세웠지만 옛 풍속을 답습하여 다투어 사치와 화려함을 숭상한 결과 혼기를 놓치는 자가 많다는 지적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국상 때 쓸 재궁(梓宮), 즉 관은 일을 당하여 만들었는데, 1433년(세종 15)에 사인(舍人)정척(鄭陟)이 미리 재궁을 만들기를 청한 것에 대해 조정에서 옳게 여겨 장생전(長生殿)을 세우고 곧 정척을 시켜 널리 황장목을 구해다가 재궁을 감독하여 만들게 하였다. 이로 인해 국상의 제도가 비로소 갖추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에서는 논의가 이어져왔다.

정재륜(鄭載崙)의 『공사견문록』에 의하면 국상 때 왕실에서는 진향(進香)을 위해 비단으로 각종 꽃과 과실을 만들어서 유밀과(油蜜果)에 꽂았는데, 매화·배·두견화·해당화·복숭아·살구·연꽃·목단·감자[柑]·유자[柚]·홍시 같은 것들을 모두 실물과 똑같이 만들어서 많은 비용이 들었다. 이 관행은 효종의 초상 때도 행해졌는데, 상을 치르고 5~6년이 지난 뒤에 효종의 벼룻집 속에서 어필 한 장을 얻었는데, 채화(綵花)를 쓰지 말라는 유계(遺戒)였다고 한다. 이에 유계를 따라 1673년(현종 14)에 영릉(寧陵)으로 옮겨 모실 때부터 진향에 채화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1713년(숙종 39) 윤5월 8일에 지경연조태채(趙泰采)가 진달하기를, “서인(庶人)의 장례에 참람하게 대나무로 만든 촉롱(燭籠)을 쓰니 지금부터 금하여 범한 자는 논죄하소서.” 하니, 왕이 옳게 여겼다(『숙종실록』 39년 윤5월 8일). 1720년 6월 8일에 숙종이 승하하자 중전이 언서로 하교하였는데, 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오늘의 상장제구(喪葬諸具)는 반드시 성상의 거룩하신 뜻을 받들고 백성들의 폐해를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 근래 호조의 저축이 탕갈하여 전하께서 무릇 빈전과 산릉의 기명 등의 물품에 들어가는 은자(銀子)를 걱정하시어 미리 만들어 ‘계(啓)’ 자를 찍어 봉해 두셨고, 빈전에 쓸 금배(金杯) 3개와 병(甁) 1좌(坐)를 3~4년 전에 이미 만들어 두셨으며, 또 상감께옵서 여러 도(道)에 해마다 흉년이 들기 때문에 3,753냥의 은자를 ‘계’ 자를 찍어 봉해 두시어 앞날의 진휼 비용에 대비하여 놓으셨던 것을 이제 호조에 내리노니, 이로써 국장(國葬)의 비용에 보충할 것이다. 윤달에 수의를 이미 준비하여 두었으니 호조에서는 반드시 전례와 같이 준비하지 말고 다만 내전에서의 지시를 기다려서 들여올 것이며 평일에 절약하시던 뜻을 받들지어다”(『숙종실록』 46년 6월 8일).

1743년(영조 19) 2월 22일에 우의정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상기(喪期)를 넘기고도 장례를 지내지 못한 자와 혼기를 넘기고도 결혼하지 못한 남녀를 초록(抄錄)하는 일을 오부(五部)에 신칙하였는데, 그 보고한 바를 보았더니, 사대부 집안의 처녀와 남자로서 36~37세에 이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한집안 내에서 4~5차례의 상(喪)이 있었는데도 수렴(收斂)하지 못한 경우가 또한 있었습니다. 서울이 이와 같으니, 지방은 알 만합니다.” 하였다(『영조실록』 19년 2월 22일). 혼상구 마련에 대한 과부담이 사회문제가 된 것으로 혼상례의 사치나 지나친 소비가 가져다준 결과다.

1751년(영조 27) 11월 26일에 있던 왕의 하교 내용을 보면 그동안 순장(殉葬)의 의미로 목노비(木奴婢)와 악인(樂人)을 만들어 무덤에 넣어왔음을 알 수 있다(『영조실록』 27년 11월 26일). 이보다 앞서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에 목인(木人), 즉 나무로 인형을 만드는 관행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는 것을 보면 아직 그러한 풍속이 근절되지 않은 것이다. 영조 때는 또한 『예장의궤』에 나라의 대상(大喪)·소상(小喪)에 쓰는 영침(靈寢) 제구(諸具)를 종전에 비단[緞]으로 하던 것을 명주[紬]로 대체하도록 하였다.

형태

김성일(金誠一)의 『학봉일고』「상례고증(喪禮考證)」편에 상장(喪葬) 때의 기구에 대해 나오는데,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세제(歲制)라는 것은 관을 말하는데, 쉽게 만들 수 없으므로 생긴 말이다. 의물(衣物) 가운데 만들기 어려운 것은 3개월이 되어야만 마련할 수 있으므로 시제(時制)라고 한다. 의물 가운데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한 달이면 마련할 수가 있으므로 월제(月制)라고 한다.

○ 효(絞)는 시신의 의복을 묶어서 단단하게 하는 것이다. 금(紟)은 홑이불이다. 효와 금은 모두 15승 포를 사용해서 만든다. 금은 모두 5폭을 사용하는데, 사(士)는 소렴 때에는 검은 이불에 붉은 속을 사용하고, 대렴 때에는 2장의 이불을 사용한다. 모(冒)는 시신을 싸는 것으로, 부대주머니처럼 만드는데, 상반신을 감싸는 것을 질(質)이라 하고, 하반신을 감싸는 것을 쇄(殺)라고 한다. 사는 검은 모에 붉은 쇄를 사용하는데, 이는 살아 있을 적에 검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던 것을 형상한 것이다. 효, 금(紟), 금(衾), 모 이 네 가지 물품은 만들기 쉽기 때문에 죽은 뒤에 만든다.

○ 상사(喪事)의 기물이란 관이나 의물 따위인데, 어버이가 오래 살기를 기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봐 미리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60세가 되면 세제를 마련하고, 70세가 되면 시제를 마련하고, 80세가 되면 월제를 마련하고, 90세가 되면 날마다 손질하는데, 그 이유는 갑작스러운 변이 있을까 염려해서이다. 하루 이틀 사이에 마련할 수 있는 물품일 경우 군자가 미리 마련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뒤에 마련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 죽기(竹器)는 가의 테두리가 없어서, 와기(瓦器)는 거칠고 질박하여 광택이 없다. 이것들은 모두 죽은 사람에게도 쓸 수가 없고 산 사람에게도 쓸 수가 없다는 특징 때문에 명기(明器)로 사용하는 것이다.

군(君)의 관은 대관(大棺)이 8촌이고, 촉(屬)이 6촌이고, 벽(椑)이 4촌이다. 상대부의 관은 대관이 8촌이고, 촉이 6촌이다. 하대부의 관은 대관이 6촌이고, 촉이 4촌이다. 사의 관은 관이 6촌이다. 군은 국군(國君)이다. 대관은 가장 바깥쪽에 있고, 촉은 대관의 안에 있고, 벽은 또 촉의 안에 있다. 국군의 관은 3중으로 되어 있다. 촌수(寸數)는 두껍고 얇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 이관(裏棺)은 비단으로 관 내부를 바르는 것이다. 붉은색 비단으로 사방을 바르고 초록색 비단으로 네 모서리를 바른다. 잠(鐕)은 못이다. 금으로 된 못을 사용하여 붉은색 비단과 초록색 비단을 박아 관에 붙인다. 대부의 관은 사방을 검은색 비단으로 바르고 네 모서리를 초록색 비단으로 바른다. 사는 관 내부에 초록색 비단을 사용하지 않는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다음은 혼례에 사용되는 용구들이다.

○ 전안지구(奠雁之具)

목안(木雁), 보(褓), 금전지(金剪紙), 사모(紗帽), 관대(冠帶), 사장복(紗章服), 목화(木靴), 자주폐의(紫紬襒衣), 황낭(黃囊), 우산(雨傘), 백목(白木) 12척

○ 납폐지구(納幣之具)

함(函), 청홍양단(靑紅兩段), 보(褓), 금전지, 혼서지(婚書紙), 혼서보(婚書褓), 부용향(芙蓉香) 2쌍, 청홍지(靑紅紙), 사촉롱(紗燭籠) 2쌍, 흑의(黑衣) 6건, 천익(天翼), 광대(廣帶), 수혜자(水鞋子), 패영(貝纓), 촉(燭) 4병, 거(炬) 1동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 『학봉일고(鶴峯逸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