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누각(天文漏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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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시계, 해시계, 기계장치 시계 등으로 밤낮의 시간을 예보하는 시각제도.

개설

각루(刻漏)의 담당자로 장루(掌漏)와 설호정(挈壺正)이 있는데, 장루는 고려 서운관과 조선초기 서운관에서 종7품직이었다. 1466년(세조 12)에 관제 개정으로 서운관이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면서 장루를 직장(直長)으로 하였다. 설호정은 고려 태사국에 속한 정8품직이며, 조선초기에는 장루서(掌漏署) 소속의 종9품직이었고, 1439년(세종 21)에는 의정부가 명나라 관제에 저촉된다면서 설호정을 장루서 승(丞)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1395년(태조 4)에 도성에 종루(鐘樓)를 짓고 1398년(태조 7)에는 광주(廣州)에서 주조한 신혼대종(晨昏大鐘)을 설치하여 저녁의 인정(人定)과 새벽의 파루(罷漏)를 시보하도록 하였다. 통행금지 시간을 알리고 도성의 문을 닫는 인정은 저녁의 초경(初更) 3점(點)에 28수(宿) 별자리에 응한 28회 타종을 하고, 통금을 해제하고 도성 문을 여는 파루는 새벽 5경(更) 3점에 33천(天)이 깨어난다는 의미로 33회 타종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의 개국 초에는 천문누각의 일을 예조(禮曹) 소속 계제사(稽制司)가 맡도록 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육조(六曹)의 직무 분담과 소속 아문을 상정하였는데, 이를 보면 예조가 예악·제사·연향(燕享)·공거(貢擧)·복축(卜築) 등의 일을 맡으며, 그 소속 관서로 계제사·전향사(典享司)·전객사(典客司)의 삼사(三司)를 두었다. 이 중 계제사의 직무 중에 상서(祥瑞)·천문·누각(漏刻) 등의 일을 한다고 하였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1406년(태종 6)의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조박(趙璞)의 계문에 따르면, 평양부에서는 별도로 토관(土官)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누각원(漏刻院)을 두어 경루(更漏)를 맡도록 하였다(『태종실록』 6년 6월 5일). 1415년(태종 15)에는 이조(吏曹)에서, 장루 사신(司辰) 직책은 서운관에 이미 있는데 궁중의 누각 관련 일을 맡은 곳으로 금루방(禁漏房)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으니 명색이 맞지 않는다면서 혁파하기를 요청하였다(『태종실록』 15년 12월 19일). 이에 금루방은 서운관에 통합되었다.

1425년(세종 7)에는 예조에서 계문(啓聞)하여, 서운관에 소속된 천문과 금루(禁漏), 풍수학은 서로 임무가 다르니 각각 정원을 배정할 필요가 있다고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천문습독(天文習讀)은 20명, 금루는 40명, 풍수학습독은 10명을 정원으로 삼았다(『세종실록』 7년 8월 30일). 같은 해 11월 29일에는 금루 담당자 40명이 4번(番)으로 나누어 입직하는데, 그 직무가 낮이면 시각을 아뢰고, 밤이면 누각을 맡는다 하였다(『세종실록』 7년 11월 29일).

그러다 1433년(세종 15)에는 예조의 계문에서 다시 천문과 금루를 통합하는 방안이 시행되었다. 금루와 천문을 함께 서운관에 속하게 하였는데, 지난 1425년에 이르러 천문의 비밀을 금루인(禁漏人)으로 하여금 아울러 익히게 할 수 없다 하여, 정원을 천문 20명, 금루 40명으로 분리하고, 천문에 속한 자는 취재(取才)하지 못하게 하여 비밀히 서로 전하게 하였으며, 또 1427년(세종 9년)에 이르러 본조에서 수교(受敎)하여 천문·점산(占算)을 다시 시재(試才)하였으나 구례(舊例)에 따라 합속(合屬)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그런데 천문은 역상(曆象)을 전임하여 임무는 중하나 인원수는 적고, 금루는 단지 경점(更點)만을 맡았으니 일은 적은데 인원수는 많은 문제가 있으며, 또 지금 중국 흠천감(欽天監)에 설호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루와 천문을 역시 따로 두지 아니한 것이 명백하니, 중국과 태종조의 구례에 의하여 천문과 금루를 다시 합속하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15년 2월 2일).

1436년(세종 18)에는 자격루(自擊漏)의 법이 이미 만들어져 금루의 직무가 가벼워졌기 때문에 금루의 체아직 1명을 감하여 풍수학으로 옮겼다(『세종실록』 18년 10월 7일). 이것은 두 해 전인 1434년(세종 16)에 보루각(報漏閣)을 준공하고 같은 해 7월 1일부터 새로운 누기(漏器)로 도성 시보 체계의 기준 시계인 자격루를 설치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사실을 이른다.

1438년(세종 20)에는 경복궁 내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 대호군장영실(蔣英實)이 흠경각(欽敬閣) 건립을 완성하였다. 그 속에는 시보 장치를 가진 자동 시계인 옥루(玉漏)를 설치해 두었다. 그 옥루의 기구 구조와 작동 방식에 대해서는 우승지김돈(金墩)의 기문(記文)에 잘 묘사되어 있다(『세종실록』 20년 1월 7일). 그런데 『서운관지(書雲觀志)』에서는 흠경각의 준공 일자를 1438년 1월 1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옥루는 흠경각 자격루라 불리며, 후일 임진왜란 때 불탄 뒤로 복구하지 못하였다.

1458년(세조 4)에는 금루이직번(李直蕃) 등이 상소를 올려 풍수학의 체아직을 금루에 옮기고 해마다 두 차례 양도목(兩都目)을 행하여 거관(去官)토록 요청하였다. 금루의 임무가 밤마다 5명이 서로 번갈아 경루를 지키고, 또 모든 제향(祭享)하는 곳을 아뢸 때는 그 수고로움이 풍수학보다 갑절이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세조실록』 4년 1월 19일). 그러나 5개월여 만에 풍수학 권지(權知) 등이 상소하여 금루로 옮긴 체아직을 풍수학으로 돌려줄 것을 청하였고, 왕이 그대로 따랐다(『세조실록』 4년 6월 26일).

참고문헌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