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로(義州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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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 의주까지 연결된 조선시대의 간선 교통로.

개설

의주로(義州路)는 한양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어진 간선도로로, 의주제1로(義州第一路) 또는 연행로(燕行路), 서북로(西北路)라고도 하였다. 조선 왕조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뒤 한양을 중심으로 X자 모양의 간선 도로망을 구축했는데, 한양에서 의주까지는 의주로를 건설하여 경기도의 영서도(迎曙道), 황해도의 금교도(金郊道), 평안도의 대동도(大同道) 등 세 역도(驛道)에 소속된 30여 개의 역참과 여러 지선 도로를 연결함으로써 서북 지방의 교통망을 조성하였다.

의주로는 특히 총 길이가 1,036리나 되는 대중국 교통로로, 사신들의 내왕이 잦아 사행로로서의 역할이 컸다. 그에 따라 의주로 주변에는 양국 사신들에게 숙박과 역마를 제공하기 위한 관(館) 또는 참(站)을 설치하였다. 또한 압록강 일대를 개척하고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4군 등을 설치함에 따라, 서북 방면의 교통은 외교와 교역뿐 아니라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컸다.

내용 및 특징

의주로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강동 6주를 개척하고 정융진(定戎鎭) 등 진보(鎭堡)를 설치하면서, 서북 방면의 외교 및 군사적 필요에 따라 개척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도성 및 지방의 도로를 조성하고 역참 제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더욱 정비되었다. 1393년(태조 2)에 도성 조성 공사를 시작하여 1394(태조 3)에 종묘·사직과 궁궐 및 시장터를 정하는 한편 도성 안의 도로 계획을 수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양 재천도 이후 1412년 시전(市廛)의 행랑이 1차 완공됨으로써 시가지의 형성과 함께 도로 제도가 정비되었다. 그 결과 1414년(태종 14) 10월에는 도로의 거리에 따라 10리마다 소후(小堠), 30리마다 대후(大堠)를 설치하여 1식(息)으로 삼는 이정표 제도를 확립하였다. 또한 1426년(세종 8)에는 도성 안의 도로 폭을 대로는 56척,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으로 제도화하였다.

따라서 도성 안의 주요 도로망은 경복궁·창덕궁 및 종묘·사직단 그리고 4대문과 4소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망과 방리(坊里) 및 각 사(司) 그리고 하천(河川)을 따라 형성된 지선도로가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도성의 도로는 도성의 대문과 연결되어 성밖 도로노선(城門分路)의 기점인 숭례문과 흥인문, 창의문·돈의문·소의문·혜화문·광희문을 통해 지방도로로 연결되었다. 그 중 의주로는 숭례문에서 출발하여, 자연암(紫煙巖) 신교(新橋)-기영(畿營) 초교(草橋)-모화관(慕華館)영은문(迎恩門)-무악현(毋岳峴)-홍제원(弘濟院)-병전거리(餠廛巨里)를 거쳐 제1대로인 의주로에 연결되었다.

1864년(고종 1)에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의주로는 병전거리를 지나 유대소록반현(踰大小綠礬峴)-양철평(梁鐵坪)-경관기(徑關基)-박석현(礴石峴)-검암참(黔巖站)-도덕수천(渡德水川)-여현(礪峴)-신원(新院)-고양(高陽)-벽제역(碧蹄驛)-헌음령(憲陰嶺)-세류점(細柳店)-쌍불현(雙佛峴)-분수원(焚修院)-신점(新店)-광탄천(廣灘川)-파주(坡州)-이천(梨川)-임진도(臨津渡)-동파역(東坡驛)-유현(柳峴)-장단(長湍)-견양암(見樣巖)-조현발소(調絃撥所)-판적천교(板積川橋)-취적교(吹笛橋)-왕서적전탁타교(往西籍田槖駝橋)-오정문(五正門)-미륵당(彌勒堂)-청석동발소(靑石洞撥所)-청석관(靑石關)-두석우(豆石隅)-구금천(舊金川)-병전거리(餠廛巨里)-대현(大峴)-금천(金川)-저탄진(猪灘津)-의현(衣峴)-금암역(金巖驛)-평산(平山)-차령(車嶺)-보산역(寶山驛)-석우발소(石隅撥所)-총수(葱秀)-안성발소(安城撥所)-상차령(上車嶺)-병암점(屛巖店)-서흥(瑞興)-토교(土橋)-서산(西山)-흥수원(興水院)-인수역(釼秀驛)-산수원(山水院)-합룡점(合龍店)-봉산(鳳山)-동선령(洞仙嶺)-동선관(洞仙關)-소동선령(小洞仙嶺)-이우(利隅)-구교(龜橋)-어초천(於草川)-황주(黃州)-강계현(岡谿峴)-흑교천(黑橋川)-저복발소(貯卜撥所)-구현(駒峴)-주염정(周冉亭)-중화(中和)-만리교(萬里橋)-대정참(大井站)-영제교(永濟橋)-장림(長林)-대동강(大同江)-평양(平壤)-서시원(西施院)-강동교(江東橋)-부산발소(斧山撥所)-석우점(石隅店)-순안(順安)-암적천(巖赤川)-냉정발소(冷井撥所)-어파현(於坡峴)-숙천(肅川)-신행원(新行院)-운암발소(雲巖撥所)-장평(長坪)-묵현(墨峴)-안주(安州)-청천강(淸川江)-적현(赤峴)-광통원(廣通院)-발소(撥所)-대정강진두(大定江津頭)-서방교(西方橋)-가산(嘉山)-효성령(曉星嶺)-납청정(納淸亭)-구정발소(求井撥所)-달천교(撻川橋)-정주(定州)-당아령(當峩嶺)-사송천교(四松川橋)-곽산(郭山)-삼장천석교(三長川石橋)-신현(薪峴)-철마천교(鐵馬川橋)-사현(蛇峴)-이현(泥峴)-임반참(林畔站)-선천(宣川)-당도현(唐道峴)-청강참(淸江站)-봉황현(鳳凰峴)-철산(鐵山)-자작현(自作峴)-용골산성(龍骨山城)-용천(龍川)-지경현(地境峴)-고진강(古津江)-전문령(前門嶺)-의주(義州)-청강참(淸江站)-동림산성(東林山城)-좌현관(左峴關)-차련참(車輦站)-서림산성(西林山城)-양속참(良束站)-소곶참(所串站)-전문령(前門嶺)을 거쳐 의주까지 연결되었다.

이러한 의주로의 특징은 첫째, 서북 지방의 평야와 멸악산맥·차령산맥 등 산악 지대를 횡단하기 때문에 영로(嶺路) 즉 고갯길이 많이 개척되었다는 점이다. 한양에서 중화(中和)까지는 한양의 무악(母岳)을 비롯해 고양의 혜음령(惠陰嶺), 평산과 서흥 사이의 차령(車嶺), 서흥과 황주 사이의 칙유령(勅踰嶺)·자비령(慈悲嶺), 중화의 구현(駒峴) 등 큰 고개를 여럿 넘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차령과 자비령은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를 연결하는 직로의 교통로였다. 또 안주에서 의주로 이어지는 구간 역시 강남산맥과 적유령산맥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숙천과 정주 사이의 흑현(黑峴)을 비롯해 안주와 가산 사이의 적현(赤峴), 정주의 당아령(當峨嶺), 곽산의 신현(薪峴)·이현(泥峴), 선천의 당도현(唐道峴), 선천과 철산 사이의 봉황현(鳳凰峴), 용천과 소곶 사이의 지경현(地境峴), 소곶과 의주 사이의 전문령(箭門嶺) 등 크고 작은 고개가 많았다.

1727년(영조 3)에 지평이정박(李廷樸)이 관서 지방의 여러 중령(中領)에 관(關)을 설치하자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관서 지방의 지리적 특징과 고갯길의 중요성을 간파한 것이었다(『영조실록』 3년 4월 29일). 그에 따라 의주로에 위치한 크고 작은 고갯길에는 진보나 산성 등 방어 시설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아 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둘째,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설치된 개성에서 의주까지의 역로를 개편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세종대의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경기우도 정역찰방(程驛察訪)이 영서역·벽제역·마산역·동파역·초현역·청교역·산예역·중련역 등 8개 역으로, 참로찰방(站路察訪)이 금교·흥의·금암·보산·안성·용천·검수·절영·동선·경천참 등 10개 역으로, 관로찰방(館路察訪)이 생양·대동·안정·숙녕·안흥·가평·신안·운흥·임반·차련·양책·소곶·의순관 등 13개 역으로 편성되었으나, 성종대의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영서도·금교도·대동도로 개편되었다.

셋째, 의주로에는 30여 개의 간로(間路)가 발달했는데, 대부분 북쪽의 압록강 인근 변경 지역과 해안 지방으로 연결되는 지선망을 형성하였다. 넷째, 의주로는 영남로와 달리 행정 중심지[邑治]와 도로·역·관·참의 분포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정치적·군사적으로 통합적인 기능을 강화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다섯째, 임진왜란 이후 조정에서는 파발제를 시행하였는데, 이때 의주로에는 기발(騎撥)을, 영남로에는 보발(步撥)을 설치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변천

조선 세종대에는 고려시대의 역도를 개편하여 의주로에 경기우도 정역찰방, 참로찰방, 관로찰방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참로찰방에는 ‘황해 7참’이라 하여 참(站)을 설치하고, 관로찰방에는 관(館)을 설치하여 역의 기능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 뒤 성종대의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영서도·금교도·대동도로 역도를 개편하고, 참과 관을 역(驛)으로 일원화하였다. 이처럼 역도를 개편함에 따라, 고려시대에 발달했던 자비령에 위치한 절령역(岊嶺驛)을 통과하는 절령로(岊嶺路)가 쇠퇴하고, 그 대신 봉산의 동선역(洞仙驛)검수역(劒水驛)을 지나는 극성로(棘城路) 또는 황주로(黃州路)가 발달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는 봉수제와 역참제를 보완하고, 변경의 군사 정보를 신속히 중앙에 전달하기 위해 파발제를 시행하였다. 지역에 따라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을 편성했는데, 한양에서 의주까지는 서발이라 하여 기발(騎撥)을 설치하였다. 『대동지지』 발참 조에 따르면, 한양 돈화문 밖에 설치한 기영참(畿營站)을 출발하여 금암참(黔巖站: 양주)-벽제참(碧蹄站: 고양)-분수원참(焚修院站: 파주)-마산참(馬山站: 파주)-동파참(東坡站: 장단)-조현참(調絃站: 장단)-청석동참(靑石洞站: 개성)-병전기참(餠廛岐站: 금주)-관문참(官門站: 금주)-관문참(官門站: 평산)-석우참(石隅站: 평산)-안성참(安城站: 평산)-관문참(官門站: 서흥)-서산참(西山站: 서흥)-수산원참(水山院站: 봉산)-관문참(官門站: 봉산)-동선참(洞仙站: 봉산)-관문참(官門站: 황주)-저복참(貯卜站: 황주)-관문참(官門站: 중화)-대정참(大井站)-지돌참(地突站: 평양)-관문참(官門站: 평양)-관문참(官門站: 평양)-부산참(斧山站: 평양)-관문참(官門站: 순안)-냉정참(冷井站: 영유)-관문참(官門站: 숙천)-운암참(雲巖站: 안주)-관문참(官門站: 안주)-광통원참(廣通院站: 박천)-관문참(官門站: 가산)-구정참(求井站: 정주)-관문참(官門站: 정주)-운흥참(雲興站: 곽산)-임반참(林畔站: 선천)-청강참(淸江站: 선천)-차련참(車輦站: 철산)-양책참(良策站: 용천)-소곶참(所串站: 의주)을 지나 의주의 관문참까지 이어지는 1,050리 구간에 총 41개의 참을 설치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의주로를 통해 침입해 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 다양한 방어 대책을 수립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주력 부대가 의주로를 통해 한양까지 직행한 점을 감안하여, 의주로의 방어 대책을 수립하였다. 1678년(숙종 4)에는 평안도암행어사이한명(李漢命)이 용천의 용골산성, 가산의 효성령 등을 방어할 대책이 필요함을 주장하였고(『숙종실록』 4년 10월 24일), 1681년(숙종 7)에는 평안병사(平安兵使)이세화 역시 효성령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고성진(古城鎭)을 신설할 것을 요청하였다(『숙종실록』 7년 11월 27일). 또 1708년(숙종 34)에는 선천과 철산 사이의 좌현(左峴)의 방어를 위해 청강진(淸江鎭)과 선천부를 동림(東林)으로 이전하자는 대책이 제기되었고, 1746년(영조 22)에는 양책참과 차련참을 폐지하고 의주로를 용천-철산-선천으로 우회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다.

결국 이듬해에 좌현을 방어하기 위해 먼저 서림성(西林城)을 축조하였고, 1754년(영조 30)에는 동림성(東林城)을 축성하였다. 그뿐 아니라 1768년(영조 44)에는 좌현 및 간로(間路)에도 직접 행성(行城)을 축성하여 의주로의 방어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의주로는 대청 무역에 종사한 상인들이 활발히 왕래하면서, 군사적인 역할보다는 외교 및 대청 교역로로서의 역할이 점점 커져 갔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대동지지(大東地志)』
  • 『해동지도(海東地圖)』
  • 『평안도읍지(平安道邑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고승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도로방어체계의 정비」, 『한국문화』34, 2004.
  • 원영환, 「조선시대 교통로와 역·원제의 고찰-서북로와 동북로를 중심으로-」, 『향토사연구』7, 1995.
  • 이혜은, 「朝鮮時代의 交通路에 對한 歷史地理的 硏究 : 漢城-義州間을 사례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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