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라역(松蘿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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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라역 |
한글표제 | 송라역 |
한자표제 | 松蘿驛 |
상위어 | 송라도(松羅道) |
관련어 | 속역(屬驛), 역승(驛丞), 찰방(察訪), 장수도(長水道), 역리(驛吏), 지인(知印), 마도(馬徒), 사령(使令), 역노(驛奴), 역비(驛婢), 청하현(淸河縣)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조병로 |
폐지 시기 | 1896년(건양 1) 1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라역(松蘿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6년 2월 5일 |
조선시대 경상도의 역도 중 하나인 송라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송라역(松蘿驛)은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중 하나인 송라도(松羅道)의 본역으로,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는 역승(驛丞)이, 1535년(중종 30) 이후에는 찰방(察訪)이 관할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장수도(長水道)의 속역이었으나, 1460년(세조 6)에 송라도 소속으로 재편되었다(『세조실록』 6년 2월 5일). 그 뒤 1462년에 역도의 재편 및 속역의 이설을 통해 역로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남역(南驛)·주등역(酒登驛)·병곡역(柄谷驛)·영양역(寧陽驛)·망창역(望昌驛)·대송역(大松驛)·화목역(和目驛)·문거역(文居驛)·청운역(靑雲驛)·봉산역(峯山驛)·육역(陸驛)·각산역(角山驛)과 함께 송라도의 속역으로 확립되었다. 이후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병곡역·대송역·망창역·주등역·봉산역·육역·남역 등 7개 역과 더불어 송라도에 편제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송라도역지(松羅道驛誌)』에는 태조대에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시대인지 조선시대인지 불명확하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 권82 「병지」 참역 경주도 조에는 경주도(慶州道)의 속역 가운데 송라역(松蘿驛)이 기록되어 있어, 고려시대에 이미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라역은 조선시대의 41역도 가운데 하나인 송라도의 본역으로, 오늘날의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에 해당하는 청하현 북쪽 1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남쪽의 흥해 망창역, 북쪽의 영덕 남역, 서쪽의 경주 육역을 연결하는 동해안 역로의 중심 역이었다. 송라역은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왕명과 공문서의 전달, 진상품 등 공공 물자의 운송, 사신의 영송(迎送) 및 접대, 왕래인의 규찰과 역마를 마련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조직 및 역할
송라역은 조선초기에는 종9품 역승이 관할하였으나, 중종대 이후에는 종6품 찰방이 주재하는 송라도의 본역이 되었다. 따라서 송라역에는 찰방을 포함해 다양한 역속(驛屬)이 배치되었다. 조선전기의 역속 구성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기본적으로 역리(驛吏)와 역노비 등이 역역(驛役)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의 경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역리 172명, 역노(驛奴) 58명, 역비(驛婢) 1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고종 때 편찬된 『송라도역지』에는 역리 15명, 지인(知印) 12명, 마도(馬徒) 10명, 사령(使令) 17명, 역노 9명, 역비 7명이 배치되어 역무를 맡아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송라역에는 역속들이 근무하는 공간으로서 다양한 역사 건물이 건립되어 있었다. 『송라도역지』에 따르면, 찰방이 행정 업무를 보는 동헌을 비롯해 역리들이 집무를 보는 공방고·예방고·호방고와 별관, 외대문, 진고(賑庫), 보민청(補民廳), 보민고(補民庫), 입마고(立馬庫), 보역청(補役廳), 내삼문(內三門), 사령방(使令房), 형리청(刑吏廳) 등이 있었다. 그밖에 군자창(軍資倉)을 비롯한 각종 창고와 관일루(觀日樓), 임영각(臨瀛閣) 등이 건립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운송 수단으로서 역마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여지도서』에는 대마 1필, 중마 3필, 복마 8필 등 총 12필로, 『송라도역지』에는 상등마 2필, 별중마 2필, 복마 8필 등 합계 12필로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시대의 송라역은 고려시대 경주도의 속역인 송라역(松蘿驛)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장수도에 소속되는 과정에서 송라역(松羅驛)으로 개칭되면서 성립되었다. 그 뒤 세조대와 성종대의 역제 개편을 거쳐 송라도의 속역이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해동지도(海東地圖)』
- 『영남읍지(嶺南邑誌)』
- 『송라도역지(松羅道驛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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