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역청(補役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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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각 고을에서 민역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에게 돈이나 물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

개설

대로변에 있는 고을의 주민들은 수많은 관리들의 왕래 시 접대를 담당해야 했다. 이로 인한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보역청(補役廳)이라는 기구가 설치되었다. 설치 초기에는 보역청에서 백성의 민역(民役)을 덜어 주었기 때문에 보역청을 설치한 지방관이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반면에 과도한 수취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어 혁파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보역청은 본래 백성을 위하여 민역을 돕는다[爲民補役]는 취지로 설립된 기구였다. 민고(民庫)의 형태로 설립되었는데, 보역고(補役庫)나 보역고(保役庫) 등으로도 불리었다. 군현은 물론이고 역에도 설립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보역청은 일반적으로 민역을 돕는 일을 하지만, 그중에서도 왕래하는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주로 맡아 보았다. 김진옥(金鎭玉)이 나주목사로 재임할 무렵 나주 지방에 사신과 관리가 자주 내왕하여 이들을 접대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역청을 설치하였다. 또한 공주목의 경우 고을에 감영이 있고 대로변에 위치했기 때문에 온갖 접대가 매우 빈번하였다. 이로 인해 민역이 심해지자 보역청을 설치하고 그 모든 민역을 보역청에서 담당하게 하였다. 1789년(정조 13) 『비변사등록』 기사에 의하면, 황해도 평산부에도 보역고(補役庫)가 있었다. 본래 이 지역 백성들은 무상으로 사신 접대를 담당해왔는데, 약 50년 전 본전 3,000냥으로 보역고가 설치된 이후 그 본전 이자로 접대하는 사람을 고용하여 사신 접대를 수행한다고 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보역청은 본 읍을 방문하거나 통과하는 관리들의 접대, 즉 가마를 메거나 횃불을 들고 음식물을 조달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이를 위하여 대동 유치미로 획급된 사객지대비 외에 환곡·식리·호렴·매답 등의 방법으로 재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자금으로 인부를 사서 민역을 대신 담당하게 하였다.

변천

무상으로 동원되는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기 위하여 보역청을 설립하는 일은 지방관의 선정(善政)으로 평가되었다. 1728년(영조 4) 충청도은진현감에 임명된 이민제(李敏躋)는 부임 즉시 세금을 경감하고 민역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보역청과 입마청을 창설하였다. 그러자 읍민들은 이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3곳에 선정비를 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의 긍정적인 효과와는 다르게 문제도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황해도 평산부의 보역고는 본전이었던 3,000냥이 유실되자 그를 보충하기 위해 족징(族徵)과 인징(隣徵)을 실시하면서 그 고을의 최대 폐단이 되고 말았다. 이런 문제 때문이었는지 1734년 백규창(白奎昌)이라는 선비는 상소하여 이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는 보민청과 보역청 등을 혁파하여 수령들이 마구 거두어들이는 폐단을 막도록 청하였다(『영조실록』 10년 1월 11일).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온재유고(韞齋遺稿)』
  • ⋇사진 : 나주의 보역청(『온재유고』 2, 기, 「나주보역청기」 - 奎1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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