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사(鄕騎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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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금위영 소속의 황해도 지역 기병으로 별효위의 후신.

개설

1682년(숙종 8) 금위영(禁衛營)이 창설될 당시 금위영은 모두 보병으로 구성되었으므로 기병 부대의 필요성이 적지 않았다. 이에 1684년 2월 우의정김석주(金錫冑)의 건의로 황해도 지역 우수한 기병을 모아 그해 가을에 별효위(別驍衛)를 창설하였다. 초창기 200여 명이었던 별효위는 곧 780여 명으로 확대되고 15번(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한성으로 번상(番上)하여 근무하였다. 이후 번상에 따른 군역의 부담이 커서 문제가 되자 1729년(영조 5) 2월에는 번상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번상하는 별효위의 수를->수 6명을 줄이고 여기에 속해 있는 보인(保人) 30명도 줄이는 조치를 취하여 별효위의 정원을 750명으로 감원하였다.

군역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번상 자체의 부담이 적지 않았고, 황해도 감영과 수영(水營)별무사(別武士)가 더 설치되어 황해도 지역의 군역 부담은 전반적으로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1745년 「숙위기사절목(宿衛騎士節目)」을 반포하여 이듬해부터 시행하게 하였다. 이에 의하면 별효위를 전부 혁파하고 황해도 감영과 수영의 별무사 가운데 가문의 지위나 신수(身手)가 숙위에 적합한 자를 뽑아 향기사를 편성하고 이들이 번상하여 숙위하도록 하였다. 그 규모는 향기사 700명과 표하군(標下軍) 56명으로 구성되었다. 매월 한 초(哨)씩 번상하도록 하였는데 각 초는 2정(正), 4영(領)으로 구성되었다. 향기사에게는 별무사와 같이 4등 도시(都試)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이들에 대한 보인의 지급도 이전과 달리 국가에서 직접 개입하였다. 3명의 자장보(資裝保)를 국가가 직접 거두어 지급하고, 2명의 보포(保布)는 향기병이 번상하여 근무하는 동안 국가에서 거두어 급료로 지급하였다.

향기사가 창설되면서 금위영의 초관(哨官) 중 네 자리를 기사장(騎士將)으로 개칭하여 번상할 때 이들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후 경기사(京騎士)가 창설되면서 기사장은 세 자리로 줄이고 경기사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담당 직무

향기사는 본래 번상하여 숙위하는 임무를 졌으나 1750년 경기사가 창설되면서 향기사의 번상 숙위 임무가 없어졌다. 대신 평소에는 황해도의 감영에 소속된 군사력으로 역할을 하고 전시에는 금위영의 기병 부대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변천

1746년의 향기사 설치와 개선 조치에도 불구하고 황해도 지역의 군역 부담은 적지 않았다. 이에 1750년 7월 황해도관찰사정형복(鄭亨復)의 건의로 향기사를 모두 황해 감영과 병영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향기사의 번상 규정을 폐지하였다. 대신 한성 출신 중에서 가려 뽑아 경기사(京騎士) 150명을 설치하고 이들이 도성 숙위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향기사의 자장보에게는 관보(官保)와 마찬가지로 모두 쌀과 포(布)를 거두어 경기사의 급료로 사용하였다. 경기사는 왕이 직접 취재(取才)하였고, 어영청과 금위영에서 각각 150명씩 뽑아 3번으로 나누어 근무하게 하였다. 이 취재에는 양반과 중인, 서인(庶人), 경외의 업무(業武)를 막론하고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영조실록』 26년 7월 28일).

향기사가 완전히 폐지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884년 8월 말 어영청 등 4개의 중앙 군영을 폐지하고 그 병력을 친군(親軍) 4영에 이속시킨 것을 계기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금위영등록(禁衛營謄錄)』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 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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